헌신하면 주님께서 도우시겠지

[궁인 목사의 호치민 이야기] 이제 손해 보면서 살자!

호치민 궁인
▲성찬식 모습.

"어, 헌신하려고 왔는데 왜 우리 딸은 안 되지?"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최근 베트남 호치민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온다. 새로운 사업을 위해, 혹은 각 기업의 주재원이 되어 입국한다. 부모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 아이들도 많다. 그런데 한국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는 많지 않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세운 학교는 너무 비싸고 입학 절차도 만만치 않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한국학교에 아이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한국학교의 입학 시험은 놀랍게도 추첨이다. 여러 개의 탁구공을 주머니에 넣고, 색깔 공과 흰 공을 뽑는다. 색깔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된다. 어찌 보면 너무도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집 큰딸이 3번이나 추첨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처음 떨어졌을 때는 '우리 아이보다 더 급한 상황에 있는 아이가 있겠지' 하면서 가족을 위로했고, 2번째 떨어졌을 때는 단 한 명 뽑는 자리에 딸의 친구가 된 것을 위안 삼았다. 물론 딸아이는 추첨장에서 대성통곡했지만. 그리고 두 달 뒤에 치른 3번째 전학 추첨에서는 3대 1이라는 그나마 만만한 경쟁률 때문인지 온 가족이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기도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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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추첨에서도 결국 안 되었다. 그 순간 3달 전의 마음과 달리 '어, 헌신하려고 베트남 왔는데 왜 우리 딸은 안 되지?'라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빨리 전학을 시키지 못하면 멀쩡한 딸이 유급된다는 염려와 함께 말이다.
우리에게는 '헌신하면 주님께서 도우시겠지' 하는 야릇한 '보상심리'가 마음 한구석에 있다. 또 그 보상심리가 충족되지 않고 약간이라도 손해 보는 것 같아지면, 의심과 억울함이 마음속에서 기웃거린다. 그때는 '본전' 생각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헌신은 하지만, 손해는 못 본다'는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우리의 헌신에는 '나의 이익'이라는 작용점이 있다. 나의 이익에 부합하면 헌신이 가능하고, 나에게 이익이 없으면 헌신은 헌신짝 취급이 된다. 때로는 이기심을 적당히 포장해 헌신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결국 주님의 제자이면서도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 각자의 이기심이다'라고 말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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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이기심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은 요나의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3,000km 이상 떨어진 스페인의 다시스로 떠나려 한다. 당시 약 3,000km의 바닷길 여행은 평생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불순종을 떠나서 엄청난 이기심의 극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할 수 없고, 내가 없다면 일도 안 될 테니 그냥 사라지겠다'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또 풍랑이 일 때 바다에 던져지는 헌신은 감당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손해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결단도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 평행이론처럼 수천 년의 시간과 수만 km의 간격이 있지만, 요나와 오늘날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비슷한 것이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헌신이고, 하기 싫으면 손해라는 속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르다. 특별히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고도 고향인 갈릴리로 향하셨다. 당시 제자들의 상식으로는 손해가 빤히 보이는 행보였다. 어떤 행패를 당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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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준비하는 모습.

여러분은 이 상식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행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손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여기는가. 그러나 당시 제자들과 우리의 예상과 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손해의 장소로 갔는데 손해 보지 않았다.
그렇다. 주님과 함께하면 손해의 장소도 환영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주님과 함께라면 손해 보는 것이 온전한 섬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기준에서 손익을 따지지 말고, 헌신과 손해를 결정하지 말자. 내 기준에서 적절한 헌신은 헌신이 아니라, 오히려 오염된 나의 신앙에 위안을 주는 면죄부일 뿐이다. 이제는 나의 고정관념을 넘어, 나의 기준을 넘어, 나의 이기심을 넘어, 손해를 넘어, 주님과 동행하고 헌신하자.
우리가 손해 보면서 헌신하고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헌신이고, 온전한 섬김이다. 이제는 손해라는 나의 기준을 넘어서 온전한 헌신으로 살아가자.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는 삶은, 손해가 아니라 온전한 헌신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이제 손해 보면서 살자! 그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인을 영접하게 된다.
/궁인 목사(베트남 호치민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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