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특새설교_십자가 가장 큰 고통:버려짐


빌립보 고난주간특새 4/6/2012
본문> 시편 22:1-21
제목> 십자가: 버려짐에서 살아나심으로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은 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이 시편을 읽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 자신이 이 시를 쓸 때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을 우리처럼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오늘 시편 22편을 읽어내려가면서 자꾸 한쪽 눈은 성경의 다른 쪽, 거의 1천뒤에 벌어진, 복음서에서 기록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 마가복음 15장을 꼭 오늘 시편 22편과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특히, 시편 22편과 마태복음 27장을 연결하면서, 2012년 고난주간에 새롭게 주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때마다 더 철저한 회개와 더 깊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고통, 가장 큰 소망이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금요일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영어표현의 Good Friday는 아이러니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이루어진 날을 좋은 금요일이라고 부르니 말입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죽었는데 그 날을 좋은 날이야라고 사람들이 한다면 좋으시겠어요?) 그런데 조금더 생각해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매달려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죽으십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제삼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15:25) 곧 오늘 오전 9시경에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히십니다. 영화 등을 통해서 보셨지만,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동물뼈가 붙어 있는 채찍에 수없이 맞으셔서 살이 다 찟겨지고,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얼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갈보리 골고다 언덕까지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로 알려진 거의 800미터 거리를 십자가를 지고 오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의 양손을 십자가에 대고 대못으로 손을 십자가에 박았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몸의 모든 신경이 고통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십자가는 세워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져서 못에 걸려있는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려고 할때 찌져지는 고통을 느끼십니다. 몸이 밑으로 쳐지기 때문에 가슴이 폐를 눌러서 숨을 막기 때문에 몸은 반사적으로 못에 걸려있는 손에 힘을 주어서 몸을 세우게 되는데, 그때 온몸의 신경 마디 마디에 전해져오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제육시 곧 정오 12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는 한밤중이었는데 밝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죽으실 때는 한낮이었는데 어둠이 임했다고 합니다) 9시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문자 그대로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절규하며 소리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하는 외침은 천년 전에 쓰여진 시편 22 1절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시편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가장 큰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
누군가로부터 버려져 보신 적 있으세요? 버림받아 보신 적 있으세요? (아 저기 뒤에 표정이 아내로부터 버림받으셨다구요?)

종종 뉴스에 나오지요? 부모가 갓난아이를 버렸다는 것. 버려짐의 아픔과 고통. 가장 가까운 사이, 가장 친밀한 관계로부터 버려진다는 것. 엄마로부터 버려진 아기가 당했을 버려짐의 아픔, 고통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요버려짐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 그 자체. 고통 그 덩어리입니다. 아까 조금 설명한대로 육체적인 고통의 크기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침뱉음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십니다. 시편22: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마태복음 27:39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러나 십자가 고통 안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로부터 버리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주간에 대한 복음서의 기사를 자세한 읽어보면,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호산나환호를 받으시고 나신 후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기도,  잡히시어 심문과 고문과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6번의 심문을 받으시는 과정에서도 예수님을 변호하거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잘 아시듯이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수제자는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십니다. Silence of God!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일까요?
육체의 질병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 그 질병의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을 말하 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배우자나 자녀를 잃어버린 사람은 그 상실의 고통을 말하실 것입니다. 우울증이나, 중독으로 인해서 그 눌리는 고통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고통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하였을 때 성경이 기록하기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해야만하는두려움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낯 얼굴 앞에서바로 코람데오,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느끼고, 경험할 때 우리들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야만 하는하나님으로 단절되는, 버려지는 것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두살 정도 되어 뒤뚱뒤뚱하지만 혼자서 걸어다니기 시작할 때, 길에 데리고 나가면 혼자서 여기저기 마음대로 걸어다닙니다. 쇼핑 몰에서도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다닙니다. 아빠나 엄마가 자기를 따라오면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안보는 것같이 하면서 슬슬보면서 확인합니다. 자기가 엄마 아빠의 얼굴 앞에 있다는 걸! 알기에 아이가 자유로운 겁니다.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놀려주려고 아이가 안볼때 기둥 같은 곳에 살짝 숨어서 보면, 그렇게 자유롭게 거침없이 여기저기 마음대로 다니던 아이가 두리번 두리번 합니다. 자기가 엄마 아빠의 얼굴 앞에 있지 않다는 걸 점점 확인하게 되는 순간, 얼굴에 불안함이 찾아옵니다. 엄마 아빠가 그때로 나오지않고 숨어 있으면, 아이는 엄청난 두려움에 크게 울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당해야하는 그 가장 큰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시어,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려지는  그 가장 큰 고통에서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도다

[가장 큰 희망]
시편 22편은 1-21절까지 탄원의 시입니다. 주변에 온통 둘러싸인 위협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매달리지만,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려진 것같아 절규하며 탄식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22절부터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절규의 탄원을 하다가 하나님을 향한 높은 감사와 찬양으로 극적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뒤부분인 22-31절은 감사와 찬양의 시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그 전환점이 되는 구절이 21절입니다. 21절에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히브리 원어성경에서는 히브리 동사 아니타니 21절이 마쳐집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감사와 찬양의 놀라운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아니타니주께서 내게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우리들의 상황, 우리들이 가장 큰 고통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주님의 응답하심은 어떠한 상황도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하심을 사모하실 바랍니다. 주님의 응답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이 잘 하는 질문이지요.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세요? 하나님 저 하나님 잘 믿어 볼려고 애쓰는데도 이러한 고통을 주세요?

그 상황과 그 고통을 뒤집는 유일한 것은 주님의 응답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침묵하셨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더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과 시선을 예수님께 더욱 가깝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렇게 가깝게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니타니응답하심으로,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인 버려짐은 가장 큰 소망인 살아나심으로 놀랍게 전환되어집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 28:6)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끊이짐이에요, 버려짐이요, 큰 어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또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함께 살아나심입니다. 부활의 길입니다. 회복이요. 구원이요. 가장 밝음으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담긴 메시지가 내가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앞으로 어떤 상황과 형편을 만난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을 새롭게 전환하는 메시지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십자가에대한 이러한 묵상으로 우리가 적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끔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시는 가장 큰 고통을 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다시금 철저히 깨달아야합니다. 오늘 하루 죄에 대한 처절한 돌이킴, 철저한 회개가 하루 종일 이루어지는 성금요일 Good Friday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놀라운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가장 살벌한 고통의 그 현장. 십자가의 죽음. 바로 내가 당해야할 그 고통의 현장까지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하여 건져내시고, 예수님이 대신 아바 아버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신 것입니다. ? 나를 사랑하셔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 3:16) 이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이 완전히 문등병으로 딱딱하게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채워지는 Good Friday 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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