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목사 설교 준비

컨텍스트에 공감하기, 그 진심과 애틋함

 
"그동안 설교론에 대한 강의 요청만큼은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설교에 대해 나눠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지 않아서지요. 설교는 툴(tool)이나 테크닉을 얻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설교는 각자가 처한 삶의 정황과 목회현장에서 사람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는 이찬수 목사가 설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애틋함'이다. 영혼에 대한 애틋함만 있어도 자기식의 설교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곧 성경 텍스트뿐만 아니라 삶의 컨텍스트를 깊이 공감하고 아는 데서 '들리는 설교'가 나온다는 그의 평소 지론과도 통한다. 그의 이런 '설교 철학'은 목회 초기에 맡은 청소년 사역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다.


설교, 세상의 잡소리를 능가할 그 무엇

"한국의 중고생들은 정말 힘듭니다. 그들에게만 있는 눌림, 스트레스, 유혹이 대단하지요. 주일에 말씀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그 다음날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자살이나 가출로 사고를 치기도 하지요. 그러나 애들인지라 아무리 설교를 열심히 잘 준비해도 막상 현장에서 그들이 듣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습니다. 바로 그 절박함에서 시작된 게 저의 목회였고 설교였지요."

청소년 사역 10년 동안 "어떻게든 애들이 내 설교를 듣게 해야겠다"는 한 가지 몸부림이 그의 설교 준비의 핵심이었다. "들리게 한다"는 게 그의 설교를 떠받쳐온 버팀목인 셈이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세상의 잡소리에 지쳐 있습니다. 곧잘 비교의식을 부추기며 '넌 쓸모없는 인간이야'라고 비하시킵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신다는 것이 설교의 취지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맞대응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지요." 

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잘 엮어내는 데 집중하는 것, 그래서 청중이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최대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가 청소년 사역 시절, 청소년들을 이해하려고 관련 책이나 잡지들을 섭렵하고, 중학생을 가장해 채팅방에 들어가 '가상 대화'를 나눈 것도 바로 이런 사명감 때문이다. 그리고 7년 전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면서도 이 설교철학은 그대로 이어졌다.

"설교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들의 상황을 깊이 체감해야 합니다.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어떤 유혹에 넘어지는지 진심으로 아파하고 그들의 상황에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 준비에 바로 그 심정을 녹여내야 하지요."

"한 손에 신문, 한 손에 성경"이란 구호대로 때로는 책이나 잡지, TV, 영화도 요긴하다. 사람을 알고 그들의 삶의 정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때 그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도와야겠다는 불쌍히 여김과 긍휼의 마음이 찾아든다. 텍스트의 전달력과 영향은 컨텍스트 이해의 정도에 좌우된다. 후자가 무르익지 못하면 전자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텍스트만 전하길 원하신다면 왜 굳이 다양한 인격을 가진 설교자를 세우시겠습니까? 설교자는 중간 미디어로서 청중들과 하나님 사이의 '배달꾼'(delivery man)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특정 컨텍스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해지려면 그들과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 매개체'가 필요했던 거지요." 

사람들도 설교에 귀기울이고 싶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워낙 번잡하다. 설교에 집중 못할 만큼 세상의 잡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많다. 이것이 그가 유난히도 컨텍스트 이해를 강조하는 이유다.

설교자는 세상에 눌려 있는 그들의 연약함을 나무라거나 세상의 잡소리 자체를 정죄할 여유가 없다. 그 모두를 압도할 만큼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 깊숙이 들려지도록 몸부림을 치기에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많이 본다고 해서 정황을 잘 알게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내게 맡겨진 양들에 대한 애틋함, 긍휼의 마음만 있다면 그 필요에 따라 책, TV 등 어떤 매체든지 동원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매체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도구들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이런 것들에 매일 필요는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예를 든다. 서울의 큰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설교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광범위한 독서를 설교의 주된 준비단계라도 되는 양 여기는 목회자나 신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그가 볼 때는 이런 추세야말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접근이다. "자신의 목회상황 속에 맡겨진 영혼들, 갈 바를 잘 알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애틋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부어 주신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어려운 형편에서 요청하는 중보기도의 제목들, 교역자들과의 대화, 그 주간에 읽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 그리고 시대적인 전반 흐름 같은 것들이 그렇게 목자로서 깨어 있다 보면 모두 말씀 안에 다 녹아져 들어온다.


'종이 묵상법'을 실천하다

미국 시카고에서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졸업한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역이민, 총신대 신대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마쳤다. 신학을 공부하며 2년 동안 초등부 사역을 경험했고,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 10년, 그리고 분당우리교회 개척 후 7년 해서 지금까지 19년 동안 목회해 오면서 설교에 관한 한 이 긍휼과 진심 어린 애틋함의 '내공'을 처음부터 내내 놓지 않았다.

사람의 연약함을 나무라거나 시대를 한탄하기 전에 그들의 컨텍스트에 깊이 공감하는 설교, 그리고 테크닉이 아닌 심장으로 전하는 오늘날 그의 설교는 이렇게 해서 빚어지게 된 것이다.

이 애틋함의 심장 다음으로 그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묵상이다. 그에게는 본문 묵상을 할 때 특이한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이름하여 '종이 묵상법'이다.

그의 경우 성경의 한 책을 택해서 차례대로 강해설교를 쭉 이어가다 보니 설교할 본문이 항상 미리 정해져 있다. 그래서 설교하기 몇 주 전부터 본문을 마음에 담는 게 자연스런 1차 설교 준비다.

마태복음 20장 1절부터가 다음 주 강해설교 본문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는 먼저 본문을 프린트한다. 보기 좋은 글자체에다 행간도 보통의 두 배 정도로 넉넉히 띄운다. 전후 문맥을 알기 위해 21장, 22장도 함께 프린트한다. 그리고 이 종이들을 들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읽고,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릴 때도 들여다본다.

하여튼 일상에서 틈틈이 생기는 자투리 시간은 남김없이 다 본문 묵상에 쏟아 붓는다. 본문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 물론 그냥 읽고만 끝내지 않는다. 꺼내 놓고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행간 사이사이에 메모해 둔다. 계속 같은 본문을 이리저리 읽다 보면 자연스레 예화도 떠오른다. 그것도 빠짐없이 적어 둔다.

새벽에도 일어나면 먼저 그 주일의 설교 본문부터 묵상한다. 그 주간에는 새벽부터 밤낮으로 그 인쇄된 본문을 들고 다니면서 되씹고 또 되새김질한다. 그러다 보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그 본문을 망으로 하나하나 걸러지는 것을 경험한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든 것이 그 본문의 망사에 계속 여과(필터링)된다.

"무언가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일상의 모든 일들이 그 하나의 테마 망 속에 걸려들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걸 느낍니다. 심지어 본문과 연관된 다른 구절들도 떠오르고, 다른 본문의 큐티에서도 설교 본문의 테마를 연결시켜내는 참 신비로운 경우도 많이 경험합니다. 설교는 이런 종합적인 묵상의 과정을 통해 한 대목씩 빚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묵상이 설교 준비의 본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폭넓은 그물망을 쳐 둔 채 본문을 깊이있게 묵상하면서 일종의 긴박감이 생긴다. 이 일상 속의 '한 초점 맞추기'에서 비롯된 집중성과 긴장감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문을 풀어내게 하는 창의성으로 연결된다. 결국 자신의 삶의 컨텍스트를 통해 투과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적절히 검증된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신명기에서 백성들에게 말한 것처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강조하는 것이 설교의 테마라면, 본문을 반복해서 읽는 가운데 모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모세의 죽음을 앞두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황도 깊이 들여다 본다.

그러면 불경기 한가운데서 신음하는 지금 이곳 성도들의 삶도 그 본문에 오버랩되고 필터링되어 다가온다. 이러한 본문 묵상과 연구에서 얻게 된 영감은 강단에 서야 할 때가 임박해오면 더욱더 긴밀해진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긍휼의 마음을 품은 상태로 받은 영감이 계속 축적되어온 까닭이다.

그러다가 설교 준비 막바지에 이르면 긴장감과 함께 창의적인 영감이 최고의 피치를 올리며 쏟아진다. 그리고 주일 1부 예배 설교가 끝난 뒤에는 강단에서 불가사의하게 주어지는 또 다른 영감이 덧입혀지면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다.




친숙함,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가 묵상 과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있다. 2차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큐티집에 나오는 설명이나 주석보다 본문을 직접 프린트한 종이가 우선이다. 2차 자료들에 의해 묵상자의 내면이 고착화되기 전에 말씀을 일대일로 직접 만난다. 말하자면 본문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나는 친숙함이 포인트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 이것이 개신교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설교자들도 이 과정을 깊이있게 경험하지 못하니까 엉뚱한 소리들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성공학 강의'를 메시지라고 전한다든지 하게 되는 거지요."

그는 참된 묵상의 실력은 '축적'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어떤 곡을 30분 동안 연습해서 연주하는 것과 초등학생이 같은 곡을 30분 동안 연습해서 연주할 경우 그 음악의 질은 다르다. 설교자들 역시 다른 명 설교자를 흉내 내려고만 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자기만의 진지한 묵상을 통해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는 것이 참된 실력을 쌓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한다. 이런 태도는 비단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회 전반에 적용된다.

"성도의 집 한 군데를 심방해도 마음을 담아 심방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그들에게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담고 본문을 보면 자연스레 그때그때의 심방에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우러나옵니다. 말씀묵상의 힘 역시 바로 이런 목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큐티든 기도든 무엇이든 지나치게 정형화시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는 꼭 이 길이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한 방편일 뿐이다. 큐티나 기도 역시 하나님과 포괄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한 과정으로 권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앙생활이나 목회사역에서 큐티나 기도는 산수의 '구구단'과 같다고 표현했다. 정형화된 신앙생활 패턴에 매이지 않고 포괄적인 영성을 누리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구구단 외우기여서다.

"생명력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역을 위해 구구단을 열심히 외우다 보면 '산수'가 아닌 '수학'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하는 그는 "사역자들이 구구단도 안 외우면서 누가 미분, 적분 풀었다더라는 데만 관심이 많다"고 꼬집었다. 어떤 특정 목사의 목회적 배경은 무시한 채 그의 설교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본다.

설교자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말씀의 창고가 있는데, 이 창고 속의 말씀과 컨텐츠가 풍성할수록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연결짓는 설교의 필터링이 더 촘촘해진다. 생각의 작은 티끌 같은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 창고는 성경을 통독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책들을 많이 읽는 가운데 더욱더 풍성해진다. 이 창고에는 목회자로서 종과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에 필요한 모든 게 다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창고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려면 설교자 자신이 경건훈련과 거룩한 삶을 위한 몸부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훈련을 직접 쌓아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예화집이나 남의 설교를 이용하는 정도로는 영감 있고 감동을 주며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하기는 어렵다고 조언한다.


강단에서 마침내 완성되는 설교 원고

이찬수 목사는 설교 원고를 일일이 다 작성한다. 이 과정도 철저히 묵상의 사이클과 함께 진행된다. 그는 주일 설교를 전한 직후인 월요일 새벽부터 설교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먼저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면 이미 마음에 담겨 있는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을 놓고 메시지의 뼈대를 대충 가늠해 본다. 컴퓨터에 설교 준비용 폴더를 만들어 거기에다 설교할 날짜와 설교 제목을 넣어 둔다. 그러고 나서 설교 본문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좀더 본격적으로 본문을 살피면서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적어 둔다. 여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월요일 새벽에 다 이뤄진다.

그 주일 본문의 테마가 "위기를 만나면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으로 정해지면 다시 소주제들을 대충 분류시켜둔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 날인 화요일부터 바쁘게 사역하는 동안 접하게 되는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영화의 대사들, 교역자들과의 대화 등이 월요일에 정한 테마의 그물망 안으로 하나 둘씩 걸려 들어온다.

그러면 그때마다 설교 준비용 폴더에 다 집어넣어 둔다. 읽은 책의 몇 페이지에 무슨 관련 내용이 있는지도 기록해 둔다. 이때 이미 본문을 프린트한 종이에다 틈틈이 메모해온 내용들도 함께 옮겨 적어 둔다.

이 모든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한 편의 설교 원고가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목요일쯤 되면 설교의 윤곽이 다 잡힌다. 그리고 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저장해둔 내용을 갖고 주로 버리는 작업을 한다. 테마의 흐름이 혼미해지지 않도록 잘 다듬고 정리하는 시간이다.

설교 원고는 주일 아침 7시에 드려지는 예배를 기준으로 보통 토요일 새벽 1시나 2시쯤에 완성된다. 이 원고를 교회에 가서 프린트해 다시 쭉 읽으면서 최종적으로 상세히 정리한다. 그 원고를 들고 1부 예배 강단에 올라간다. 원고를 일일이 다 쓰지만 줄거리가 머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강단에서는 거의 원고를 보지 않는다.

그렇게 준비한 원고로 1부 예배 설교를 전하고 나서는 그 원고를 다 찢고 다시 쓰기 시작한다. 2부 예배가 시작되기 전 한 시간 동안 사무실 문을 잠궈 놓고 1부 예배 설교를 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가지고 다시 설교 원고를 정리한다.

많은 경우 그 원고로 2부 예배 때 말씀을 전한 후에도 마치고 와서는 또 원고를 찢어버리고 다시 정리한다. 그러고 나서 3부 때부터야 비로소 완성된 원고로 설교를 전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는 이 과정을 아주 중시한다. 그 스스로 본문을 앞에 놓고 준비하고 애쓰는 과정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설교 준비가 다 끝난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강단에만 서면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영감이 나오는지는 정말 저도 잘 모르는 신비입니다. 성도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전하고 싶지만 나의 한계와 둔감함 때문에 내 힘만으로 다 못 전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럴 때 빠트려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예기치 않게 강단 현장에서 튀어 나옵니다. 이것은 설교자만 경험할 수 있는 신비요, '물 떠온 하인들만 알더라'고 할 때의 은밀한 은혜라고 할 수 있지요."


'직업적인' 설교를 피하려는 목마름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데 매번 열중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변변한 설교집 한 권 출간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경험했다며 감사를 표시하는 성도들에게서 그러한 대외사역에 비길 수 없는 큰 보람을 느낀다.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마치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는 성도들의 반응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설교 가운데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너무도 미미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는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전달될 때는 왠지 무기력해지는 듯할 때 낙심도 맛본다. "설교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못 미친다는 목마름이 항상 있다"고 말하는 그는 한편으로 설교자가 더 좋은 것, 더 순도 높은 메시지로 못 전해준 데 대한 안타까움 없이 자족한다면 오히려 더 위험한 건지 모른다고 조언한다.

"요즘은 틀린 설교나 잘못된 설교는 아닌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설교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는 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설교를 해야 하니까 그저 어쩔 수 없이 하는 듯한 설교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직업적인' 설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형편에 깊이 들어가 있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설교지요."

"성경대로 잘 좀 살아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게 사람이다. 그들에게 상식적으로만 말씀을 전하면 깊이있는 결단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자신이 전하는 그 말씀을 통해 세상의 소리에 혼미스러워하는 성도들을 깨워야겠다는 절박함이 담긴 설교라야 영혼들을 변화시킨다. 그 결론이 윤리적인 도전을 주는 것이든 말씀 자체를 선포하는 것이든 이 목적 하나만큼은 분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학적인 배경 연구가 약한 이유

이찬수 목사는 스스로 자신의 설교 준비에 학적인 연구가 부족한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주석을 많이 참조하거나, 텍스트 묵상을 중심으로 생활 속에서 준비한 설교를 주석으로 검증하는 작업 또한 충분치 않다. 설교를 준비할 때 교과서적으로 무턱대고 자신이 선택한 본문의 구절들에 대한 주석부터 들여다보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생기는 약점이다.

"저는 설교의 테마를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속에 필터링되는 특정한 내용들을 따라가면서 필요하다고 느낄 경우에만 제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책이나 자료들 가운데서 주석적인 연구를 보충하는 편입니다. 묵상을 통해 연결고리를 찾아나가다 보니 체계적이진 않지요. 주석에서 설교의 영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설교자가 직접 묵상을 깊이 있게 해나가는 식의 접근 과정을 더 선호합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재미있는 표현으로 낮추어 '후루꾸'(일본어 '후롯쿠'의 변형으로 '진짜가 아니거나 실제와 다른 것'을 낮추어 이르는 말)라고 했다. 물론 이것을 신앙용어로 해석하면 '은혜'다. 은혜로 버무려진 설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 안에 이미 오랫동안 내면화되어온 신학적인 틀과 배경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면에 장로교 합동측의 신학적 색깔이 체질화되어 있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누가 그의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 순복음신학교 나왔구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신학의 역할은 설교의 틀을 잡아주는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0장을 설교한다고 할 때 먼저 특정 주석에 매여서 본문을 보려는 자세를 피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 통로나 저 통로가 다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다고 믿는다. 주석을 보고 연구해서 설교하는 것이나 주석을 안 보고 설교하는 것이나 결과는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주석보다 그가 참조하길 좋아하는 것은 실제 목회 현장 설교자들의 설교다. 그는 여러 목회자들이 설교한 것들을 많이 참조한다. 때로 그들의 설교에서 좋은 예화나 영감을 얻어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준비하는 주중에 계속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가며 준비한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이번 주는 또 어떤 고생을 하며 보낼까'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무슨 꼴을 먹일지에 마음을 쓰다 보면 어느새 본문의 윤곽이 뚜렷이 잡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하루 24시간 내내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신학교의 설교학 시간에 영감있게 배운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한 기능의 영역에 주로 관심을 두다보니 실제 목회현장에서 적용되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학문성 자체가 부실했던 건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전해야 할 설교의 정황과 필요성에 대해 좀더 '절실한' 그 무엇이 부족했다 싶습니다."

매주 한 번씩 어김없이 돌아오는 주일마다 말씀으로 성도들의 절박한 필요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이 설교학의 이론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역시 성경신학의 틀이나 복음의 윤리성 같은 설교의 얼개를 귀하게 여긴다. 성경이 주는 교훈의 핵심을 찾기 위해 이러한 학문적인 도식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때로는 지나치게 경직된 틀로 굳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성경신학과 주해는 기본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모순이 많습니다. 이 아들에게는 '넌 연애하지 말고 공부 좀 해라'고 말하지만, 저 아들에게는 '넌 공부만 하지 말고 연애도 좀 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버지 마음입니다. 경우에 따라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거지요. 성경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은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위로여야 한다거나 훈련을 독려해야 한다거나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도식 자체가 온전치 못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학문적 배경을 참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데 머물러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성경 안에 면면히 흐르는 통합적인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핵심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강하게 도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 불쌍히 여기고 "그 정도만 해도 잘 하는 것"이라고 격려해줘야 할 때도 있다.


옥한흠 목사에게서 배운 설교 스피릿

이찬수 목사는 자신을 가리켜 '야전사령관'이라고 말한다. 목회 사역의 출발점 자체가 청소년들의 척박하고도 절박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정기적인 멘토링을 받으며 차근히 성장해온 배경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단점으로 꼽을 정도다. 가출한 애들 잡으러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그들이 은혜 받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한걸음에 내달려온 듯한 목회 여정이다.

훗날 성인 목회를 시작하면서도 이 패턴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성인들 역시 표현만 좀더 점잖을 뿐 그들도 하나님 없이는 철부지다. 양육이 필요하고 때로 책망도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서야 할 사람들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이들을 섬기다 보니 줄곧 야전사령관으로 홀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도 설교에서만큼은 분명한 모델이 있었다. 그가 섬기던 사랑의교회의 옥한흠 목사였다. 그는 설교 초창기에 옥한흠 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한번에 10만 원어치씩 구입해서 차를 타고 다닐 때마다 꾸준히 들었다. 그러면서 옥 목사가 어떻게 설교하는지를 부지런히 분석해 보게 되었다.

"옥 목사님의 설교는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거나 메마른 설교도 아니었지요. 성도들을 향한 절박한 심정과 애틋함이 묻어나오는 설교, 그들이 성숙해가도록 때로 야단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는 그런 설교를 힘 있게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대하면서 설교의 스피릿 같은 걸 배우려고 많이 애썼지요."

그는 옥한흠 목사가 설교에서 사용하는 특정한 스킬을 흉내 내려고 하진 않았다. 흉내 낸다 해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서다. 다만 설교의 참된 스피릿, 그 정신을 배우고자 했다. 정신만 제대로 자리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독특하게 주신 은사에 따라 자기만의 스타일이 나온다고 보았다. 다만 그는 이 과정에서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중대한 함정 한 가지를 지적했다. 

"저는 설교자들에게 처음부터 너무 자기만의 스타일이나 은사를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것은 목회에 깊이 녹아 들어가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따라 옵니다. 좋은 걸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자를 다듬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5만 개나 되는 교회를 허락하신 데에는 그만큼 그 각각의 교회와 목회자를 통해 다양하게 일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결과다. 그러나 이 다양성의 중심에 바로 각 지역교회 목회자의 성도를 향한 긍휼의 마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아비의 마음이 놓여 있다.


파토스에 강한 '분당우리교회' 설교자

설교는 메시지 자체(로고스: Logos)와 설교자의 삶(에토스: Ethos), 그리고 청중의 정서적인 부분(파토스: Pathos)으로 이뤄진다. 요즘 설교는 점점 더 에토스와 파토스를 강조해가는 분위기다. 이찬수 목사의 설교는 한 시대의 코드와 잘 맞아떨어진 면이 있다. 그는 설교자로서 특히 파토스가 강한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장중하게 '선포'하기보다는 때로 '애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그의 설교는 엄중한 '아버지식 설교'보다는 애살스럽게 타이르며 따듯하게 다가오는 어머니 품 같은 설교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의 일관된 설교 철학이 녹아 있다. 그가 설교자로서는 드물게도 체계적으로 잘 정립된 설교자이길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그는 당대 한국교회의 대표적 설교자인 옥한흠 목사라는 설교의 스승을 잘 만났고, 제자훈련 스피릿을 바탕에 깔고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전달하는 데 꾸준한 열매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설교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함수는 '하트(heart)', 즉 마음이다. 그것은 곧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대변하고자 하는 긍휼이요 불쌍히 여김의 마음이다.

그는 설교자로서 한국교회의 젊은 목회자들이 본받기를 원하는 설교자 1위에 선정된 적이 있다. 인터뷰를 끝내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돌아보았다. 의외로 그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설교자로서 굳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얻어 내려고 욕심을 내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 이상의 비교의식에 쉬 함몰되지도 않는다. 다만 청소년 사역으로 시작하여 척박한 한 시대의 사회적 폭력과 횡포 가운데 아파하는 영혼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그 아픔을 말씀으로 어루만지는 설교자로서 빚어져 온 고유의 목회적 배경에 대한 감사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섭리적으로 만난 보수주의 신학에 충실하고, 자신의 분야가 아닌, 그러나 얼마든지 대외적으로 균형잡힌 설교자로 평가받을 만한 그럴싸한 아이템에 쓸데없이 눈독을 들이지도 않는다. 자신이 처한 목회적 상황에 자신의 설교를 하나의 신적 도구로 성실히 짜맞춰나가는 것 외의 거창한 다른 목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그저 '분당우리교회'에 적합한 목회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사람에게 필요한 한 지역교회의 목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도 공개적으로 자신과 잘 안 맞는 성도들은 다른 교회로 가라고 뒷문을 열어 놓는다.

자신은 샘플도 모델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정한 목회적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로 오늘날 '이런 목사'가 된 것이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설교의 장단점에 대해 이리저리 가려서 알아내려 하기보다는 현재 교회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꼴을, 그것도 더 좋은 것으로 먹여야겠다는 의욕만으로 가득하다.

그는 그저 소외되어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 같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분당 지역 중산층 교인'들의 삶의 정황에 충실해야 할 자신의 설교 입지에는 지혜롭고 균형잡힌, 어쩌면 본능적이고 육감적이기까지 한 목회 감각을 발휘한다. 이 '무척 무식해 보이는 아주 유식한 뚝심'이 그의 연약한 듯한 어조로 이어지는 설교에 스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담대함의 비밀이 아닌가 싶다.

그의 복음적이고도 본문의 문맥을 벗어나지 않는 강해설교에 적절히 안배되어 있는 생활 속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간증, 거의 표적을 빗나가지 않는 유머, 성경을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 때에 맞게 끌어와 적용시키는 시사적인 통찰 등은 이러한 컨텍스트에 충실하려는 진심어린 몸부림의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그 적용으로 현재 한국 사회의 소외 계층을 위한 구제와 섬김 사역에 전 교회가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설교철학에 기인한다.

설교는 철저히 개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이뤄진다. 간혹 설교의 방향이나 목적을 '한국교회 개혁'에 두고 설교 영향권의 반경을 너무 넓게 잡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찬수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늘상 가까이 이웃해 있는 평범한 교우들이다. 아니, 평범하기보다는 현실의 고난에 부닥쳐 심신이 지쳐 있고 조금만 더 어려워지면 못내 포기할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담임목회자로서 그의 설교는 바로 그들, 그 '작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소망과 힘을 공급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오히려 그래서 자신은 특별한 아픔 없이 평범하게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보통 사람들의 영적 안이함과 무지를 여지없이 깨트리고, 다시금 원색적인 복음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추스르게 하는 도전을 매번 설교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던지곤 한다.

이찬수 목사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되 다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성도들의 고달픈 삶의 현실 앞에 자신의 목회적 양심을 늘 투명하게 비춰 보며 깨끗하게 닦아 내려고 부단히 애쓰는 설교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곧 설교자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기와의 싸움이자, 하나님께서만 은밀하게 보시고 인정해 주실 그 설교의 고지에까지 다다르기 위해 늘 '초심'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끊임없는 '복음의 회복'을 향한 싸움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그간의 목회 여정 가운데 어렵사리 깨닫고 체득하게 해주신 영혼을 향한 애틋함이 이후로도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지금까지 잘 이어온 설교자로서의 그의 내밀하고도 소중한 싸움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건강하게 계속되어 마침내 영광스런 완주의 마침표를 찍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글/ 안환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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