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지성호씨는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 어린이)였다.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노동자구(區), 두만강이 흐르는 학보탄광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그는 열세 살부터 부모님을 따라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졌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에서 석탄을 훔쳐다 팔았다. 열여섯 살이 된 어느 날, 속도를 줄이지 못한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매달려 있다 사고를 당했다. 왼쪽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먹을 것이 없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시절이었다. 한쪽 팔과 다리만 남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가족에게 짐이 될 순 없다.’
목발을 짚고도 달리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쳐 파는 꽃제비 생활을 이어갔다. 배짱 두둑한 성격 덕분에 석회 장사(북한에선 페인트가 귀해 석회석을 구운 생석회로 칠을 한다)로 돈도 벌었다.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월경(越境)도 주저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소문의 꼬리도 길어져 보위부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버는 만큼 뜯겼다.
수차례 보위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다음에 잡히면 죽이겠다’는 협박도 무서웠지만 ‘병신’이라는 말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죽음을 각오한 탈출 행렬
2006년 어느 날, 엄마와 여동생이 먼저 국경을 넘었다. 그와 남동생이 뒤를 따랐다. 마지막까지 고향에 남아 있던 아버지는 두만강을 건너다 잡혀 고문을 받다 죽었다.
탈북자들은 대부분 다시 북으로 돌아갈 바엔 죽는 게 낫다며 몸에 극약을 지니고 다닌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쪽 팔과 다리만으로 중국에서 라오스・미얀마를 거쳐 태국까지 1만km에 이르는 여정을 견뎌냈다. 20여 일에 걸쳐 한여름의 열대지방을 통과했다. 길은 대부분 험난한 산맥이었다.
방콕의 난민수용소는 아비규환이었다. 건물 한 동에 50~60명의 난민이 수용됐다. 햇빛을 볼 수 있는 외부활동은 일주일에 두세 번뿐.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는 석 달 만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장애에 대한 배려였다. 같은 곳에 수용됐던 동생은 열 달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비행기에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휠체어를 갖고 마중 나온 정부 관계자를 보았다. 북한에서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 존재이지만 한국에서 장애인은 다르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한국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살았다. 길 위를 가득 메운 자동차, 높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마치 30년 후의 미래 세계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을 나와 충주에 자리를 잡았다. 낮에는 컴퓨터학원을 다니고, 밤에는 포장마차를 했다. 장사가 잘되는 날은 하루에 5만원도 넘게 벌었다. 여기선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옆집 할아버지가 남한 땅에서 잘살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서울 대학’ 가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충주에서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서 대입 준비를 할 때 동갑내기 복지사를 만났다.
“성호씨, 남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탈북자들도 좋은 일 해야 해요.”
‘착하게 살자’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힘든 탈북 과정을 겪으며 ‘남한에 가면 통일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지 대표는 알고 지내던 탈북자 40명과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동국대 회계학과에 입학했다. 스스로 시간표를 짜야 했고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도 나지 않아서 놀라웠다. 입학식 후 첫 번째 수업은 〈경영학원론〉. ‘남한 말’도 어려운 게 태반인데 아예 모르는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대학 공부를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영어 선생님 겸 함께 살게 된 룸메이트는 재미교포 선교사였다. 그에게 북한에서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떻게 탈북했는지, 지금도 2400만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포 선교사는 놀라기만 할 뿐 그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왜 당신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남한 사람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은 그들을 왜 모른 척 하느냐”고도 했다.
몇 달 뒤 성탄절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는 룸메이트, 로버트 박의 모습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았다. 선교사였던 친구는 북한인권운동가가 되어 북한 국경을 넘었다.
“북한 주민과 아무런 관계없는 미국 시민권자, 로버트 박도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계에 호소하는데 나중에 통일이 된 다음, 내가 과연 고향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을까? 통일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400만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하여
2010년, 지 대표는 자신과 같은 탈북자, 남한에 와서 만난 친구 그리고 해외교포 청년 12명과 함께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Now Action & Unity for Human Rights)’를 만들었다.
거리에 나가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전단지부터 나눠주기 시작했다. 대북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소리를 전했다. 남북청년 소통의 장을 마련, 남북 문화를 알리는 이벤트도 꾸준히 열고 있다. 국제사회에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고 인권개선을 호소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근에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힘을 쏟고 있다.
지 대표는 지난 5월 26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슬로자유포럼’의 24인의 연사 중 한 명으로 초청됐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인권운동가와 정부 관계자 300여 명은 그의 이야기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포럼이 끝난 후 주최 측인 국제인권단체 인권재단(HRF)은 나우를 돕겠다고 나섰다. 펀딩 사이트를 통해 사무실 임대 보증금을 마련해줬다.
탈북자 구출 후원 계좌에 후원금이 모이면서 탈북자 구출사업도 시작했다. 어린이와 여성, 장애인이 주 대상이다.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사람을 남한으로 데려왔다. 작년 초 한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탈북자 구출 후원이 대폭 늘었다. 순식간에 1억원에 가까운 액수가 모였다. 나우 결성 5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10월 초 현재까지 49명의 탈북자를 구출했다.
“남한으로 온 탈북자 수가 2만8000명이에요. 우리는 이미 통일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남북 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통일은 정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떤 형태로든 통일은 현실이 될 거예요. 북한 주민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어요. 북한의 시장경제를 굴리는 것도 ‘돈’이 된 지 오래니까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향한 북한 주민의 열망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얼마 전 나우는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다. 지난 2년 동안 지 대표는 낡은 건물 5층에 있는 사무실을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한쪽 팔과 다리에 보조기구를 찬 그에게는 재래식 화장실도 고역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지 대표. 그가 남한 땅에서 찾은 행복의 가치는 돈이 아니었다.
“자유 없는 나라에 자유를 돌려주고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에게 인권을 찾아주는 일, 죽음의 문 턱 앞에 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남한 땅에서 찾은 행복입니다.”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 후원 문의 : 02-2271-2070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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