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목회의 새 패러다임을 찾아서
김영봉 승인 2019.04.04 05:59 댓글 0 기사공유하기
“식민도시, 유배 그리고 주변성: 이민목회의 새 패러다임을 찾아서”(Colony, Exile and Marginality: A Search for a New Paradigm for Immigration Ministry)-1
이 글은 2019년 4월1일에 있었던 버지니아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of Virginia) 제2회 학술공개강좌 “Diaspora 신학과 한인교회”에서 김영봉 목사가 발표한 것으로, 본지는 3회에 걸쳐 연재하려 한다.
1962년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책을 펴냄으로써 과학계뿐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요즈음에는 일반인들도 쉽게 사용하는 ‘패러다임’(paradigm) 혹은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표현을 유통시킨 사람이 쿤입니다. 그는 ‘패러다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Universally recognized scientific achievements that, for a time, provide model problems and solutions for a community of researchers.
일정 기간 동안 연구자들의 공동체에 정형적인 문제 의식과 해법을 제공하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과학적 업적 이것은 과학 분야에 국한하여 정의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대상을 연구할 때면 누구나 공유하는 전제와 믿음과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이전 사람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움직인다는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모든 대상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이 들어 맞지 않는 증거가 하나씩 드러납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계속 연구를 하는데,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증거들이 축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기존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입니다. 그동안 과학계에서 이루어진 혁명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토마스 쿤의 주장입니다. 코페르니쿠스도 그렇고, 뉴톤도 그렇고, 아인슈타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인물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작동되지 않는 축적된 증거들을 토대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쿤
토마스 쿤
이것은 과학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학문 영역에서도 학자들 사이에 어떤 패러다임이 공유되고 있고 그 틀에서 연구를 진행합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신학계에도 몇 번의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교의 한 지류로서의 기독교를 보는 패러다임에서 세계
종교로서 기독교를 새롭게 보도록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입니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평생 활동을 했다면 이런 역할을 하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가는 곳마다 쫓아 다니면서 그를 밀어냈기에 그는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갔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유대인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복음을 규정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로써 바울 사도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공헌을 이룹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들은 대부분 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틀로 기독교 교리를 새롭게 정의한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와 장 깔뱅도 그랬고 칼 바르트가 또한 그랬습니다. 이들이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들로 평가되는 데에는 그들 자신의 천재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만, 사실은 그들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질문과 저항과 깨달음과 주장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존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많은 증거들이 축적된 바탕에서 신학적인 천재들이 나타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 것입니다.
크리스텐덤 패러다임(Christendom Paradigm)에서의 목회
목회 영역에도 일반적으로 공유된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있어서 목회자와 신도들은 그 틀 안에서 생각하고 일합니다. “당신은 어떤 패러다임 안에서 목회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딱히 답할 정도로 의식적으로 어떤 패러다임을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나 그 시대에 공유되고 있는 패러다임에서 목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목회의 패러다임은 무엇일까요?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이민 교회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깊이 그리고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교회 목회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한국 교회 그리고 한인 이민 교회의 목회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국 교회 목회의 패러다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요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가장 중요하고 또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이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4세기에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것은 기독교 역사에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것도 역시 그 이전까지의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임계점에 이르러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과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콘스탄틴의 회심으로 인해 기독교는 소수자의 종교에서 다수자의 종교로, 의심받는 불법적 종파에서 합법적 종교로 그리고 박해 받던 종교에서 권력자의 종교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은 수 세기 동안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지만, 그 축복은 머지 않아서 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미국의 개척 시대의 교회의 역할이 지금의 패러다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로 신앙적인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이민 온 개척자들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점령한 지역에 가장 먼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교회는 주민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고 또한 주민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그 때 유입된 종파들(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의 ‘주류교회’ mainline churches)이 지금은 점점 쇠락해 가고 있지만, 개척 시대의 교회의 역할은 지금도 미국의 신앙인들에게 신화와 같습니다. 이 신화에서 교회는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하고 미개한 세상을 교화하고 지배해야 합니다.
셋째, 미국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은 1970년대 이후로 시장주의와 상업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구가 도시 중심으로 몰리면서 형성된 ‘메트로 문화’와도 걸음을 같이 했습니다. 한 마을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주민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던 교회는 도시 문화와 근교(suburban) 문화가 형성되면서 메가 처치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위치로서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규모로서 중심이 되어야 했습니다. 교회 역사 상 들어 본 적이 없는 ‘교회 성장 운동’이 시작된 것이 이 시기의 일입니다. 그로 인해 ‘무한 성장’이 도심과 근교 교회들의 이상이 되었고, 이 이상은 성장의 기반이 없는 농촌에까지 퍼져 나가게 됩니다.
종교 사회학자들은 이 세 가지 원인 외에도 더 많은 원인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세 가지가
현재 미국인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형성한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이 그대로 한국 교회로 유입되어 한국 교회와 한인 이민 교회의 패러다임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크리스텐덤 패러다임’(Christendom Paradigm)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완전 복음화를 이루어 온 세상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중심과 세상의 정상에 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이 패러다임이 꿈꾸는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철저한 분석을
종교 사회학자의 과제로 맡기고, 여기서는 일선 목회자의 시각에서 보는 세 가지 특징 만을 지적해 보려 합니다.
1) 중심부에 선 교회
초대 교회는 땅끝을 향해 퍼져가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부활 후에
다시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늘 낮은 곳으로 찾아가셔서 병든 자들과 밀려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땅끝까지 나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공인 이후로 교회는 중심을 향해 진격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미국 개척자들에게
있어서도 교회는 언제나 마을과 도시의 중심에 세워져야 했습니다. 여기서 ‘중심’이라는 말은 지역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합니다. 교회는 각자 자신이 사는 세상의 중심에 서기를 원했고, 또한 돈과 권력을 소유하여 중심의 자리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남미 국가들을 가 보면, 타운마다 정형화된 구조 즉 시청과 광장과 성당이 어느 타운이든지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라는 패러다임이 반영된 도시 구조입니다.
콘스탄틴의 공인 이후로 교회는 권력과 금력의 맛에 빠졌습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무력한 사랑과
희생과 헌신의 힘에 의존했는데, 콘스탄틴 이후로는 권력과 금력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중세기의 가톨릭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 개혁 이후로 세계로 퍼져 나간 개신교회도 역시 이
패러다임을 따라 선교해 왔습니다. 이 패러다임이 미국의 상업주의와 만나 생겨난 변종이 메가 처치
운동입니다. 겉으로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운 중심에 거대한 성당을 세워 놓고 모두를 불러 모았던 가톨릭 교회의 모습이나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메가 처치는 근본에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2) 지배하는 교회
콘스탄틴 이후로 중심에 서게 되면서 교회는 점령하고 지배하려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틴 이전까지의 교회에는 섬김의 능력, 희생의 능력, 사랑의 능력 밖에 없었습니다.세상을 점령하고 지배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세상을 감화시키고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황제의 승인을 받은 이후에 중심에 서게 되니, 권력과 금력으로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십자군 전쟁을 감행한 것이고, 유럽의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하고 지배할 때 교회가 함께 들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척자들에게도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소명을 받은 기관이었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현대 교회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는 여전히 지배자로서의 패러다임으로 교회를 봅니다. 특별히 기독교 인구가 다수인 미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리 펠월(Jerry Felwell)이 시작했던 Moral Majority 운동도 그렇고, 그 이후로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이나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이 인기를 끈 것도 미국 신도들이 이런 패러다임에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 안에서 신실한 신도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여전히 절대 다수의 위치에서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을 꿈꾸고 있고, 그렇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3) 번영의 복음
이 패러다임은 하나님 나라 보다는 땅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게 만듭니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는 것이 이 패러다임에서 나온 구호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 땅에 크리스텐덤(Christendom) 즉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력도 필요하고 금력도 필요합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이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각이 이 패러다임에 고착된 결과로 나온 것이 ‘번영의 복음’입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기복신앙’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복음의 왜곡이요 복음에 대한 배반입니다. 복음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인데, 번영의 복음은 초점을 이 땅으로 옮겨 놓습니다. 복음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인데, 번영의 복음은 이 땅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는 것을 목적 삼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은 좋은 믿음의 증거요, 실패와 고난은 영적 실패의 증거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좋은 믿음의 증거는 고난이요 희생입니다.
메가 처치가 모두 번영 신학을 팔아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메가 처치를 일군 목회자들은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삶의 비법’을 전하는 설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입니다. 메가 처치를 찾는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보험 상품을 찾을 때 최소의 프리미엄으로 최대의 보상을 얻으려는 계산을 하는 것처럼, 교회를 찾으면서도 희생은 최소로 하고 이득은 최대로 얻으려 합니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그러한 욕구에 맞추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노력합니다.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에 깊이 물든 까닭입니다.
종교 사회학자들은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 더 많은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특징이 지금의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콘스탄틴의 공인 이후 지난 천 수백 년 동안 지배했고, 개척자들에 의해 미국화되었으며, 최근에 와서 상업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도시화의 영향으로 더욱 강력해진 이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으로 인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패러다임이 먹혀 메가 처치의 현상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미국 전체를 두고 보면 기독교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고 쇠락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 현상은 위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한 때 메가 처치가 대안이며 대세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문제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한 두 세대가 지나고 나면 거대하게 지은 메가 처치들은 힘을 잃고 비어갈 것입니다.
현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이 아직도 크리스텐덤 패러다임 안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도 기독교는 이미 다수자의 위치를 잃어 버렸습니다. 미국민들에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절대 다수가 그렇다고 답하지만, 201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22%이고 거의 매 주일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10%에 불과합니다. 대학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것이 조롱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중심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고 지배권을 되찾고 싶어하며 그래서 번영의 신학을 팔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민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 교회는 태생적으로 이 땅에서 소수자 중에 소수자입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무한 성장을 추구하고 중심에 서기를 원하며 이 세상에 대한 소위 ‘거룩한 지배력’을 행사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서 번영의 복음을 전파하고 기복신앙을 부추깁니다. 믿음 좋은 이민자들도 아메리칸 드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공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은 머지 않아 화로 변모합니다. 성공을 향한 분투로 인해 목회자 자신이 병에 걸리거나 탈선하는 경우도 있고, 교회의 내적인 문제가 불거져서 메가 스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메가 처치를 안식처로 삼았던 신도들은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교회에 담을 쌓고 살기도 합니다. 반면, 더 많은 목회자들은 그 노력에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이민 교회들의 절대 다수가 자립 수준 이하라는 통계 수치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목회자들이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집니다. 목회를 청산하고 세속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붙들려 있는 이 패러다임이 수 많은 패잔병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김영봉목사 / 와싱톤사귐의교회
“식민도시, 유배 그리고 주변성: 이민목회의 새 패러다임을 찾아서”(Colony, Exile and Marginality: A Search for a New Paradigm for Immigration Ministry)-2
이 글은 2019년 4월1일에 있었던 버지니아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of Virginia) 제2회 학술공개강좌 “Diaspora 신학과 한인교회”에서 김영봉 목사가 발표한 것으로, '이민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에 이은 두번째 글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 인해 그동안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 틈틈이 제기 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반성과 대안이 계속 누적되어 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요즈음 자주 ‘제 2의 종교 개혁’을 이야기 하는데,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 누적되어 임계점에 이르면 그와 같이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나기까지 이러한 문제 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선 자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패러다임이 노정해 왔던 문제들을 극복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혁명의 시기를 앞당기는 일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을 지배하고 있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세 가지의 사례를 살펴 보려 합니다. 아래에서 보게 될 세 가지 사례는 그동안 기독교계 안에서 제기된 수 많은 사례들 중에서 선택한 것입니다만, 학계와 교계에서 꽤 주목을 받았던 것들입니다. 이 사례들은 주로 북미주 안에서의 교회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반성하면서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1) 식민 도시(Colony)
미국에서 가장 신뢰 받은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와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설교자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이 1986년 펴낸 (한글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은 신학계와 교계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고 지금은 현대 고전 중 하나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듀크 대학교에서 함께 가르쳤던 두 사람은 공동 저작을 여러 편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이 책은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사진:플리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즈는 “기독교인들이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적 과제는 교회를교회 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 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분파주의자’라는 비판도받았지만 그는 치밀한 논리와 신앙적 확신으로 이 주장을 계속 펼쳐 왔습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기독교가 미국 안에서 ‘다수자의 종교’로서의 위치를 상실 했다는 현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아직도 크리스텐덤을 꿈꾸고 있는데, 그것은 지나간 망상에 불과합니다. 저자들은 현재 목회자들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목회자들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그래서 그들 스스로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175쪽)
달리 말하면, 지금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중심에 서는 것이며 지배력을 가지는 것이고 이 땅에서 번영하는(혹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에 있어서 성공하는 소수가 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성공하는 소수도 실은 외형적인 성공 아래에서 신음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싸움터에서 낙심하고 절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그런데 이들의 이름은 군대다. 수가 많기 때문이다) “실패”보다 더 나쁜 일이 있다고, 그것은 바로 “성공”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218쪽)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 목회 성공은 실패보다 더 불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공은 신앙과 교회와 목회의 본질에서 그만큼 벗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그 성공으로 인해 목회자 자신은 마치 영업에 성공한 사람처럼 타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저자는 교회를 ‘식민 도시’(Colony)에 비유하고 신도들을 ‘거류민’(Resident Aliens)에 비유합니다.
저자들은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 비유에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잔재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를 이땅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식민 도시’로 보는 것은 과거 미국 개척 시대의 사고 방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 자체는 제국주의적인 잔재를 포함하고 있지만, 비유의 포인트는 받아 들일만 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다수자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버리고 낯선 문화와 생활방식에 에워쌓인 식민 도시로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합니다. 두 저자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회는 대안 공동체인 식민지를 세우도록 부름받았으며, 또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의 삶을 그리스도가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징표와 신호가 되라고 부름받았다. (202쪽)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다른 저작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거룩한 ‘성품의 공동체’(Community of Charact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라는 말은 이 세상과는 다른 삶의 가치와 질서로 움직여지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매력을 발산 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2) 유배(Exile)
최근에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의 목회학 교수인 리 비치(Lee Beach)는 (한글판 <유배된 교회: 가나안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책을 통해 북미의 변화된 상황 안에서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북미 교회의 상황을 성경에 나오는 유배 상황에 비유합니다. 마치 낯선 나라에 잡혀 와 포로 생활을 하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소수자의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리 비치 교수
그는 유배 상황에 처한 교회에 적실한 패러다임을 찾기 위해 구약성경의 유배 모티브를 연구합니다. 유배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과 다니엘서, 에스더서 그리고 요나서를 통해 유배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거룩함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길을 모색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베드로전서에서 유배 모티브를 연구합니다. 리 비치의 접근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와 유사한 주장을 하지만 책의 절반을 성경적인 선례를 논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집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4세기에 시작된 크리스텐덤 패러다임도 성경 안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인정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포로기에 새롭게 등장한 ‘남은 자 신학’이나 유배지에서의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오늘 이 사회에서 소수자가 된 교회에게 큰 위로와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리 비치는 유배기에 처한 공동체와 신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의 선포’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배기에 지도적인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역할들 중 하나는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유배기의 교회에 필요한 희망은 낙관적인 느낌이나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고, 새로운 운동을 고무하고, 신앙이 유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선교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허락하는 생성적인 희망이다. (204쪽)
사실, 소수자의 위치로 밀려난 교회와 사역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절망감 혹은 무력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하찮게 생각하고, 복음을 조롱합니다. 크리스텐덤의 패러다임 안에 있으면 이러한 상황이 절망감과 패배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유배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교회보다 더 소수였고 더 무시 당했고 더 박해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고 희망을 가질 이유가 그들에게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배라는 패러다임으로 지금의 현실을 보면 절망감과 패배감을 벗고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은 세속적인 수치에 근거한 희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희망입니다.
3) 주변성(Marginality)
1995년 드류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고 이정용 교수는 (한글판 <마지널리티>)를 통해 미국 안에서 사는 소수자의 시각에서 신학과 목회에 대한 신선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시아계 이민자의 경험과 시각에서 나온 작품이기에 주류 신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유럽 전통에서 백인들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소위 ‘주류 신학’이 보지 못하는 차원을 주목하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정용 교수도 역시 크리스텐덤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 패러다임은 북미의 주류 교회에도 통하지 않지만 북미에 있는 이민 교회들에게는 더욱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이민자로서의 소수자들의 상황을 잔디밭에 피어난 민들레꽃에 비유하는 자서전적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존재 자체로서 이미 소수자의 처지에 있는 이민 교회들이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수용하여 세상에 중심에 서서 지배하려 하는 것이 가장 큰 패착임을 지적합니다. 현재 교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에 대해 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나는 중심성이라는 한 단어로 현실 교회의 상황을 요약할 수 있다. 현실 교회는 중심주의적 동기에 깊이 빠져 있다. 중심부 이데올로기와 신념을 위한 위계적 구조에 근거해 가난한 사람, 소수자, 무력한 사람을 배제하고 통제한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의도한 교회의 핵심에 반대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주변인이었기에 주변성이 교회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 중심성의 규범에 토대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에 반대된다. (196쪽)
이정용 교수의 통찰은 북미 교회의 크리스텐덤 패러다임과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점을 동시에 겨냥합니다. 이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심부로 진격하게 만들고 따라서 신앙이
현세적인 번영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도록 만듭니다. 그러한 경향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게 만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정용 교수는 성공을 향한 욕망에 대해 이렇게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영역이든 종교적인 영역이든 성공에 집착하는 동기 중 하나는 지배 집단에 속하기
위해서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다. 목회의 성공은 종종 예수-그리스도의 주변부적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배 사회의 중심부적 가치에 의해 판단된다. (197쪽)
이정용 교수는 지금의 교회가 중심부에 서기를 추구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더 이상 중심성의 중심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205쪽)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교회를 진정한 주변성의 공동 체로 만드는 근본적인 변화”(206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주변부 사람이며 종이라야 한다”(214쪽)고 말합니다.
‘주변부 사람’이 된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은유입니다. 그것은 먼저 그의 지향성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중심을 향하여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자리에 눈길을 두고 발길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누구와 연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심부에 서서 중심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정용 교수는 “사회는 중심의 관점에서 주변을 규정하지만, 교회는 주변의 관점에서 중심을 규정해야 한다”(206쪽)고 말합니다. 그것은 또한 목회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물량적인 성공을 지향하는 것은 중심성의 가치에 물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어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목회의 초점이 될 때 주변성의 공동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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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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