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면 문닫는 빵집... 손님들 편지가 끊이질 않았다
[리뷰] EBS 다큐멘터리 <길 위의 인생>이 주목한 시골 빵집
16.09.04 11:25최종업데이트16.09.04 11:25
▲ 시골 빵집에서 집으로 가는 가는 길매일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빵집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다.ⓒ EBS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매일 따뜻하게 구워내는 일본의 한 시골 빵집이 있다. 천연 균을 연구했던 할아버지와 마르크스를 공부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기만의 일을 하고 싶었던 와타나베 이타루(46)씨가 운영하는 빵집이다. 그의 저서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는 일본의 아마존 사회경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이번 주로 막을 내리는 EBS 다큐영화 <길 위의 인생>은 일본의 돗토리 현 치즈 정에서 시골빵집을 운영하는 이타루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새벽 4시가 되면 시골 빵집에 불이 켜진다. 천연 효모로 만드는 빵 반죽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문제는 적절한 타이밍이다. 설탕과 버터, 우유와 달걀 없이 누룩 균만으로 맛을 내기 때문에, 발효 시간에 따라 빵의 풍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매일 반죽의 상태를 점검한다. 일정한 점성을 유지한 채로 종잇장처럼 늘어지면 합격이다. 매일 어려운 실험을 하듯 빵을 만든다. 아내 와타나베 마리코(39)씨는 빵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가진 남편의 든든한 지원자다. 남편의 연구자 같은 기질이 시골 빵집을 지켜온 근본적인 바탕이라 믿는다. 결혼 조건으로 귀촌을 내세울 만큼 마리코씨는 '시골살이'를 꿈꿨다. 유기농 농산물 회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마리코씨는 가게 매장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시골살이의 환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 빵 반죽을 살펴보는 와타나베 이타루씨.매일 살펴봐도 빵 반죽의 타이밍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늦어서도 결코 빨라서도 안 되는 적절한 타이밍이 곧 제빵의 전부다.ⓒ EBS
아무리 바빠도 이타루씨가 지키는 원칙이 있다. 잘 쉬어야 일이 즐겁다. 일주일에 이틀 휴업을 한다. 무리해서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다. 직원들 월급과 가족 생활비만 충당되는 범위에서 제빵사로써의 일을 즐기고 싶다. 혼자 커가는 가게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과 믿음을 갖고 함께 성장하는 가게이고 싶다. 시골 빵집을 통해 이타루씨가 추구하고 싶은 궁극의 지향점이다. 시골빵집이 지역 경제의 순환 통로가 되어 지역 농가와 함께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이타루씨는 이웃과 함께 공생의 길을 열어가는 지역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 고집스러운 젊은 제빵사의 소박한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곁에서 일을 돕는 빵집 직원들과 빵의 속 재료로 쓰일 농산물을 키워주는 동네 어르신들. 텃밭에서 나는 채소 꾸러미를 들고 손수 빵집까지 찾아오는 할머니부터 생전 처음 유기농 채소를 키워보는 할아버지 모두 외진 시골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이타루씨의 꿈을 지원하는 후원자다.
마을 '진흥협의회'에서 활동하는 후쿠야스씨는 이타루씨 같은 젊은 사람들이 '톱니바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도시와 농촌을 연결해주는 톱니바퀴가 되어 농촌 인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온 후쿠야스씨는 폐교된 초등학교를 보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언젠가 마을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신의 모교인 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이타루씨의 시골빵집이 잘 되는 것이 마을이 좋아지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덧 이타루씨의 꿈은 혼자만의 꿈이 아닌 것이다. 오늘도 이타루씨는 빵을 만든다. 1년 8개월 만에 배양에 성공한 누룩 균으로 만든 폭신폭신한 질감의 맛을 내는 빵. 마을 인근 숲에서 공수해온 대나무 통에 고슬고슬하게 찐 밥을 넣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누룩이 내려앉을 때까지 며칠이고 기다린다. 푸른 곰팡이 대신 황금빛 누룩 균이 가득 담긴 대나무 통을 기대하며 화분에 물을 주듯 조심스럽게 흰 쌀밥 위로 물을 뿌린다. 이타루씨는 말한다.
"천연균을 사용해 만든 빵 중 10-20퍼센트는 실패했어요. 속상하기도 하지만 실패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우주가 담긴 빵
▲ 이타루씨와 마리코씨가 운영하는 시골 빵집의 내부천연 누룩 균으로 만든 빵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EBS
오븐에 넣은 빵 반죽이 시간이 지나도 부풀어 오르지 않아 전량 팔지 못할 상황에서도 실패를 도전의 재미로 연결시키는 이타루씨는 탁월한 실험 정신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효모는 예민하다. 그날의 기온과 습도뿐만 아니라 그릇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대나무 통 30개를 만들면 그 중 배양에 성공하는 것은 1개에 불과하다.
천연 효모로 숙성시킨 반죽에는 천연 균이 내뿜는 이산화탄소가 기포처럼 방울방울 솟아오른다. 그 상태에 따라 오늘 날씨가 어떤지, 반죽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빵 반죽을 만들 때마다, 꼭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 마치 반죽이 어떤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반죽이 보내주는 신호랄까.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빚어지지 않지만, 매일 기다리고 치대는 반죽을 통해 마주하게 될 꿈은 분명하다는 확신을 다진다.
오후 5시면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함께 차리는 저녁 밥상과 휴일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 가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 매일매일 아이들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 비쳐질 세상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모두의 성장이기를 꿈꾼다. 진정한 이윤은 쌓아두는 게 아니라 분배하는 것임을 믿고, 오늘도 빵을 굽는다.
하나의 빵 속에 담겨지는 각각의 재료는 우주를 지배하는 '순환의 원리'에 충실한 재료들이다. 썩지 않을 재료는 음식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부패와 순환은 자전거의 바퀴처럼 동떨어져 있지만 세상을 만들어가는 큰 원동력이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소멸할 운명을 타고 났으므로, 구워진 한 덩어리의 빵 역시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는 빵을 주문한 고객의 편지글이 수록돼 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순간, 입에 문 빵 조각을 음미하며 행복하게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한 조각의 빵은 누군가에겐 최후의 만찬이 된다. 그런 빵에 이스트와 설탕과 같은 첨가물을 넣어 억지로 발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돈이라는 첨가물로 부패하지 않는 경제를 살찌우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빵이 빵답게 구워지는 세상이 되려면, 누군가의 마지막 만찬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빵의 풍미를 지켜내려면, 값싼 원가와 노동력이 아니라 충분히 발효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삶의 여유가 필요하다. 진짜 하고 싶은 나만의 일, 진짜 살아보고 싶은 세상이 어느 시골 작은 빵집에서 향긋하게 구워지고 있다. 새로 만들고 싶은 빵을 상상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과 발맞춰 걸어가는 시골길 어느 모퉁이에서, 빵 굽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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