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땅 북간도를 가다

윤동주의 땅 북간도를 가다
교회 마당에서 놀며 자란 시인의 정취를 온 몸으로 느끼다
 
신평식 
윤동주의 땅 북간도를 가다
▲ 용정학교의 윤동주시비.     ©뉴스파워 신평식
2010년 8월, 한상렬 목사의 방북으로 온통 교계와 한국 시민운동권이 소란할 무렵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서러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북간도 지역 만주벌판을 밟았다. 한때는 말달리고 활을 쏘던 선구자의 땅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은 독립운동 흔적이 선연히 남아 있다. 용두레 우물가에 모여 한담을 나누는 조선족들에게서 우리네 이웃들의 모습을 본다. 일송정에서 내려다보는 해란강은 넓은 만주벌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 무엇보다 깊은 생각을 이끈 것은 시인 윤동주의 생가다. 청년의 기백으로, 기독교신앙으로 시대를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사색의 기반을 염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용정에서 10여 분 거리 명동촌에 자리한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그야말로 ‘인걸은 간데없고 잡초만 무성한 채’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 된 ‘서시’는 여행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서시)

학창시절 배운 윤동주 시인은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시에서는 저항이나 민족보다는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서정성이 배어있다. 또한 그 안에 흐르는 창조주에 대한 경외와 결코 헤프지 않는 찬미는 내가 시를 쓰면서 줄곧 추구하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때문에 시를 통해 만난 시인의 출생지 명동촌의 생가와 명동교회, 그리고 그가 다닌 학교인 용정시 용문가의 용정중학교(윤동주가 다닐 때의 이름은 은진중학교)를 찾아본 이번 여름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교회 마당에서 놀며 자란 시인 
▲ 윤동주 생가터에 있는 표지석     ©뉴스파워 신평식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한국 즉, 조선반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왜 만주벌판(현재의 중국)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구한말 만주는 척박한 함경도 땅과는 달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성지였다. 때문에 봉금령으로 묶어 두었던 토지는 농사짓기에 아주 비옥한 환경이었다.

두만강변의 조선 땅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 141명이 1899년에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갔으니 대규모 이주였다. 만주 땅에서 농산물을 많이 수확해 잘 살아보자는 뜻이 가장 컸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그곳에 들어감으로써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인재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키우겠다는 의지도 이주민의 마음속에는 담겨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이 이주해간 북간도 명동촌에는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고, 교육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네 가문이 들어간 다음해인 1900년에 한 발 늦게 18명의 식구를 이끌고 명동촌에 들어갔다. 윤하현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의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출생 3개월 전에 고종사촌 송몽규가 태어났는데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된다.

이러한 배경이 윤동주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이번에 찾은 명동촌 윤동주의 생가는 도로에 인접해 바로 교회가 있고, 그 앞마당을 거쳐 생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곧 교회 마당이 시인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음을 웅변해 주는 것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 교회 마당에서 놀면서 주일이면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기독교 환경에서 그의 세계관을 형성해 간 것이다.

교회 마당에 서서 지그시 눈을 감자 사방으로 무성한 잡초사이로 넓은 마당이 트이고 왁자지껄 시끄럽게 놀이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다시 눈을 뜨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생가는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한다. 집 안쪽으로 가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는 '윤동주 생가 옛터'라고 적혀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여기서는 유적지를 <관광점>으로, 문학연맹을 줄여 <문련>으로 쓰는 것 같다. 연구소를 <연구중심>으로 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중국식 표기법이다. ‘아 여기가 중국이구나!’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 중국에 남아 있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 생가와 나란한 명동교회당.     ©뉴스파워 신평식

그를 시인으로 키워낸 것은 용정의 자연과 신앙이다

윤동주는 이 집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31년 늦가을, 용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 <어린이>를 구독하면서 시인의 꿈을 막연히 키워가던 시인에게 있어 이 집과 교회 그리고 용정의 자연은 그야말로 시의 모태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교원으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는 가문의 배경으로 교회생활과 학교생활을 통해 깊이 있는 상상력을 키워갔으리라. 또한 명동촌과 용정의 자연은 넓고 비옥한 만주벌판이어서 쌀과 옥수수며 감자와 콩 등이 풍부하다. 위도가 높아 겨울이 빨리 오기는 하지만 맑은 바람과 높은 하늘, 그리고 밤이면 쏟아질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은 그의 심비에 고향의 노래로 자리 잡았다. 유독 그이 시에서 바람과 별을 노래하는 시어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리라.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했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글’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자 친구들과 명동에서 10여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마침 그 무렵 명동에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하여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를 하고, 윤동주의 용정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3년 뒤 1934년 12월 24일은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를 쓴 날이다. 1935년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시도하는데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학년을 낮춰 입학한다. 숭실중학교 학회지에 시 <공상>이 게재되어 최초로 활자화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하자 윤동주는 용정으로 되돌아왔고,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2월에 졸업했다.

한편 1936년 4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송몽규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는다. 용정중학교 역사전시관 벽에 도표로 그려진 학교 연혁사를 보면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가 다 용정중학교의 전신(前身)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시인은 이 학교에 5년 반을 다닌 셈이다.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비가 세워진 것은 1992년 9월 10일이었고,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덕분이었다.

윤동주는 1938년에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1939년에는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지용을 만나 시에 관해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이 해에 같이 입학한 경남 하동 출신 정병욱과 친해졌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원고를 잘 간직했다가 광복 후에 시집으로 출간하여 윤동주라는 시인이 있었음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1941년,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에 졸업하고는 졸업 후 한 달 반 고향집에 머무르는 동안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유하여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2년 4월 2일, 그는 일본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여 재학중이던 1942년의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데, 이때 마음이 바뀌어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이는 당시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다니고 있던 연희전문 동창인 송몽규가 있는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윤동주의 전학은 죽음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14일에는 윤동주도 검거되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 윤동주의 학창시절. (뒷줄 오른쪽)     ©뉴스파워 신평식

독립을 꿈꾸며 신앙과 자연,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인 
사실 우리는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힌 것으로 생각하는데 윤동주 시인은 당시 송몽규라는 친구와 함께 독립을 위해 문화운동 차원에서 연극을 해 보려고 했던 꿈을 꾸는 것이 그가 잡힐 때 모습의 전부였다고 한다. 조국을 찾겠노라 다짐하고 꿈꾸던 젊은 윤동주가 그렇게 옥중에서 한 줌의 재가 된 것은 광복 6개월 전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체실험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이국의 추운 독방에서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고는 운명하였다.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였다.

금번기행에서 백두산에 올랐지만 가득한 안개와 비바람으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한치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천지의 모습에서 분단된 조국 현실과 널리 흩어져 중국국민으로 살아가는 한민족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두산을 지척에 두고도 중국 땅을 돌아 올라야 하는 장백산(백두산의 중국이름)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과객을 맞아준다. 그 척박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맑은 눈과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했던 시인처럼 이 세상도 살만한 곳임을 노래하리라. 서울로 돌아오는 길 짧은 비행시간 내내 시인의 언어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글/신평식(문인, 본지편집위원)


▲ 윤동주 생가 뒷편에 선 필자.     ©

▲ 윤동주 생가.     ©뉴스파워 신평식

▲ 윤동주 생가 내부 모습.     ©뉴스파워 신평식


▲ 윤동주 생가와 나란한 명동교회당.     © 뉴스파워 신평식

▲ 용정학교.     ©뉴스파워 신평식
▲ 윤동주의 장례식.     © 뉴스파워 신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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