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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기독교가 낳은 세 명의 신여성

초기 한국 기독교가 낳은 세 명의 신여성

교사 신마리아, 의사 박에스더, 간호사 김배세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매로 신마리아(Mary Shin), 박에스더(Esther Pak), 김배세(Bessie Carnahan Kim)를 꼽을 수 있다. 신마리아는 1896년 서울 정신여학교의 초대 교사가 되었고,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부터 10년간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했다. 김배세는 1910년 세브란스간호원양성학교를 제1회로 홀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수간호사로 활동했다.
신, 박, 김 세 명이 각각 다른 성인데도 어떻게 한 자매일까? 이들은 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인 아버지 김흥택과 어머니 연안 이 씨의 딸로 태어났다. 이들은 아버지가 아펜젤러 선교사 집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세례를 받을 때 마리아, 에스더, 캐러한 등의 세례명을 받았고, 결혼할 때 남편의 성을 따라갔다. 그래서 신 씨와 박 씨로 성이 바뀐 것이다. 김배세의 영어 이름은 'Bessie Carnahan Kim'이었는데 중간 이름 '캐러한'은 세례명(평양 남산현교회 노블 선교사에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이다. 그녀는 이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언니들과 달리 성이 바뀌지 않았다.
  
▲ 앞줄 왼쪽부터 박에스더, 김배세, 신마리아.
정신여학당 초대 교사로 활동한 신마리아
큰 언니 신마리아는 정신여학당(연동여학교)을 나와 1896년부터 정신여학당 초대 교사가 되어 수학과 성경을 가르쳤다. 교직에 종사하며 여성 교육을 위해 주일학교 부인 성경반, 사경회와 연합 전도회의 운영에도 적극 참여했다. 연동장로교회의 첫 여집사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박에스더의 어릴 적 이름은 김점동(金點童, 1876~1909)이었다. 가난한 집 셋째 딸이라 변변치 않은 이름이었다.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여학생에게 의식주를 제공하자 부친은 1886년에 딸 점동을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시켰다. 명석한 점동은 한글 성경, 요리문답, 한문, 영어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조금씩 복음을 이해하면서 거짓말과 훔치는 일을 멀리하고 청결한 마음을 위해 기도했다.
감리회 여성 병원인 정동의 보구여관(保救女館: 이화여대 병원 전신)의 첫 여의사였던 메타 하워드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자,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의사가 후임으로 뉴욕에서 파송되어 왔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환자를 돌보아야 했던 셔우드는 간호사가 없는 상황에서 통역과 보조원이 필요했다. 이때 영어를 가장 잘 하던 김점동이 매일 몇 시간씩 병원에 가서 셔우드 의사를 돕게 되었다. 점동은 통역, 약 조제, 환자 간호를 좋아했다. 다만 피를 보는 수술을 지켜보는 데에는 몸을 사렸다. 조금씩 병원 생활이 익숙해지던 중 그녀는 셔우드 의사의 언청이 수술을 통해 새 삶을 살게 되는 여성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점동은 자신도 의사가 되어 그런 수술을 하겠다고 선언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셔우드 의사는 의학 훈련반을 개설하고 점동을 가르쳤다.
1891년 1월 25일 주일 15세의 점동은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올링거(Franklin Ohlinger) 목사에게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소녀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따로 세례명을 받았다. 이날 세례를 받고 기쁨에 넘친 에스더는 셔우드 의사에게 편지를 썼다.
"소중한 친구에게, 당신은 미국 사람이고 나는 한국인 소녀이지만, 나는 당신을 친언니처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큰오빠입니다. 내가 바르게 행하면 나는 예수의 자매요, 당신도 예수의 자매입니다. 오늘 나는 기쁨이 충만하고, 오늘 나는 찬란한 빛으로 빛납니다."
얼마 후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저보다 지혜롭습니다. 저는 지혜롭지 못합니다.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 제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이나 용서해 주세요. 저는 한국인 소녀요 당신은 미국인 숙녀입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조금밖에 모르지만 당신은 제 마음을 잘 압니다. 제 마음은 좁고 좁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급하게 화를 냅니다. 제 마음은 금방 벌겋게 달아오르는 당신의 화로와 같습니다. 제 마음이 유리처럼 깨끗하고 세상처럼 넓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언제나 당신과 저를 도와주시고, 당신과 저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한국에 보내셨고 저를 이 집에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여러 해 동안 당신을 도와줄 것을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에스더의 관심은 언제나 청결한 마음, 넓고 지혜롭고 헌신된 마음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의 기초임을 선교사들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소녀들은 대개 14세가 되면 결혼을 했다. 에스더가 16세가 되었을 때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첫째와 둘째 언니가 시집을 갔다. 어머니는 아직 댕기 머리로 있는 과년한 에스더가 걱정이었다. 친척들도 에스더만 보면 "다 큰 애가 시집도 안 가고 뭐하냐?"며 성화였다. 그러나 에스더는 결혼하면 공부할 수 없으므로 고민이었다. 셔우드는 약혼자 윌리엄 홀 의사가 1891년 12월에 내한하자 1892년 6월에 결혼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남편의 조수인 박유산(1868~1900)을 중매쟁이를 통해 소개했고, 1893년 5월 24일 에스더의 혼인식이 열렸다. 한국인의 첫 기독교 결혼식이었다. 에스더는 8살이 많은 남편에게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그의 성실한 모습을 보면서 1년이 지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욱 간호와 의료 수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1892년 평양 선교 지부 첫 선교사로 임명받은 홀 의사는 몇 차례 탐사 여행 후에 1894년 4월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했다. 동행하자는 홀 부인에게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어요. 평양 문을 열어 주시면 평양으로 가야지요. 저는 주님께 몸과 영혼과 마음을 드렸으니, 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 주님의 것이에요. 비록 사람들이 저를 죽이더라도 동족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데 제 생명을 드리겠어요. 저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름다운 물건을 많이 가지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에스더는 선교가 금지된 평양에 선교사 정신으로 갔다. 그러나 곧 박해 사건이 일어나 김창식 등이 투옥되었다. 박유산도 구타를 당하고 감금되었으나 홀 의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사태 수습 후에 에스더는 홀 부인을 도와 평양에서 처음으로 여성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두 서울로 철수했다. 홀 의사는 다시 평양으로 가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94년 11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내가 평양에 간 것을 후회하지 마시오.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이니 주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오"였다. 평양은 홀 부부, 김창식, 에스더의 선교 정신으로 개척되었다.
홀 부인은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내기로 결정하고 1894년 12월 출국했다. 에스더는 의학 공부를 위해 자신을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홀 부인은 선교회의 허락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에스더와 남편 박유산을 데리고 미국에 갔다. 에스더는 1895년 리버티공립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홀 부인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박유산은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했다. 1895년 9월 에스더는 뉴욕시 유아 병원에 들어가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통해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했다. 이렇게 에스더가 낯선 땅에서 힘든 유학 생활을 보내던 도중 홀 부인은 에스더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함께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 혼자만 편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중략) 제가 준비되기 전에 먼저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서 불쌍한 우리 자매들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도와줄 신실한 친구를 보내어 주실 것입니다. 의대에 입학한다면 의사 수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만둔다면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라면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또 제 남편이 무엇보다 제가 의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이며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에스더는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홀 부인은 기금을 보내어 1897년 1월 평양에 홀 기념 병원을 세웠다. 그녀는 1897년 11월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돌아와서 보구여관에서 의료 사업을 하다가 1898년 5월 평양으로 갔다. 박유산은 아내의 학업을 즐겁게 도왔다. 그러나 박유산은 식당에서 일하다 과로로 폐결핵에 걸렸고, 에스더가 간호를 했지만 1900년 4월 28일 병사했다. 에스더는 32세의 나이에 이국에서 나그네 삶을 마감한 사랑하는 남편을 볼티모어 로레인파크공동묘지에 묻었고, 3주 후 졸업장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 의료 선교를 위해 홀 부인과 에스더는 남편을 잃었다.
1900년 5월 의대를 졸업하고 최초로 한국인 여의사가 된 에스더는 독신으로 미국 북감리회 여자해외선교사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한국에 파송되었다. 에스더는 서울의 보구여관에서 일한 첫 10개월간 3,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에스더는, 도와준 친구들의 기대와 서원대로 동포 자매들을 섬기는 의사가 된 것이 기뻤다. 이후 9년간 진료실, 입원실, 왕진하는 집 어디에서나 탁월한 기술과 따뜻한 마음으로 매년 5,00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여자 성경학교 교사로 위생이나 교회사 등 필요한 모든 과목을 가르쳤다. 또한 평양부인병원(광혜여원)을 비롯해 평안남북도, 황해도 산간벽지를 돌면서 조선의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1909년 5월 28일은 에스더와 한국 여성사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여성교육협회와 여성사업협회는 최초의 여자 대학 졸업자인 의사 박에스더와 문학사 하란사에게 표창장과 금메달을 주었다. 그러나 박에스더는 그때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투병 중이었고,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1910년 4월 13일, 안타깝게도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홀 부인의 아들 셔우드는 에스더와 수많은 한국인의 생명을 앗아간 결핵을 퇴치하겠다고 결심했고, 1928년 해주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항결핵 운동을 전개했다.
박에스더는 첫 여의사로 봉사한 공을 인정받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동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에스더는 첫 여자 전도인이자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로 1910년 4월 하늘의 전당에 헌정되어 면류관을 썼다.
  
▲ 훈장을 받은 박에스더(1909년)와 세브란스병원간호원양성학교 제1회 졸업생 김배세(1910년).
세브란스 최초의 졸업 간호원 김배세
김배세(金背世, 1886∼1944)는 1906년에 9월 쉴즈 간호원이 설립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학교에 1907년 1월 첫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녀는 1908년 예모식(가관식)을 거쳐, 1910년 6월 10일 제1회로 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 최초의 한국 졸업 간호원이 되었다.
그녀는 1894년 청일전쟁 직후 언니 에스더를 따라 평양에 가서 의사 홀(Rossetta S. Hall) 부인의 진료소에서 보조로 일했다. 이어서 서울 연동 정신여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언니 에스더가 있는 평양으로 다시 가서 1906년까지 남산현여자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홀 의사가 설립한 맹인학교에서 지리, 악기, 노래 부르기 등을 가르쳤다.
김배세는 1907년 1월 세브란스 간호원양성학교가 두 명의 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할 때 입학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신축된 후 최대 선교 병원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와의 연합 강의와 실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 조수와 교사 경력에다가 영어까지 능해 병원과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쉴즈 간호원은 김배세에게 간호학 강의에 사용할 논문과 글을 미국의 간호학회지 (AJN)이나 책에서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겼다. 그녀는 1908년 초 두 명의 수습 간호원에 대한 첫 예모식 때 김신성과 함께 간호모를 쓰고 학생 간호원이 되었다. 1908년 12월 세브란스병원에는 예모식을 거친 학생 간호원 7명(김배세, 김신성, 조원숙, 박영신, 강성은, 오현숙, 안경혜)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학생 간호원 2명과 수습 간호원 3명이 추가되면서 12명의 간호원이 있었는데, 김배세가 수석이었다.
김배세는 3년의 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10일 제1회 졸업식 때 홀로 졸업장을 받고 세브란스병원 최초의 한국인 졸업 간호원이 되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와 함께 "현대사회가 여성계에 제공하는 여러 직업 중에서 가장 순결하고 고상한 직업"의 문을 연 사건이었다.
김배세는 영어 실력이 좋아 1907년부터 맥스웰과 포프가 지은 을 번역하여 <예수교신보>에 '간호촬요'로 연재했다. 이것은 모아져서 교과서로 사용됐다. 그녀는 졸업한 후에 세브란스병원에서 몇 년간 부간호원장으로 봉사했는데, 그녀의 지도력을 보고 간호원장직이 고려되기도 했다. 1911년에는 간호 관련 논문을 계속 번역했다. 미국간호학회지(AJN)에 실린 '폐렴 간호'를 번역하여 간호원회에서 발표했다. 간호부양성소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1년 2월 3일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는 김신성, 조원숙, 박영신을 제2회 졸업 간호원으로 배출했다. (조원숙은 세브란스병원 수술실 간호부로, 김신성과 박영신은 청주던컨병원과 전주예수병원 간호부로 취직했다.) 1912년 김배세와 이그레이스는 환자들을 위한 한국 음식 전시회를 개최했고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김배세는 여러 해 동안 평양 감리회의 기홀병원(Hall Memorial Hospital)에서 간호부장으로 봉사했으며, 1920년대에는 부산에서 수간호원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말년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1944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신마리아, 박에스더, 김배세 세 자매는 1920년대 신여성이 등장하기 이전에 기독교가 낳은 1900년대의 선구적인 신여성, 1세대 신여성들이었다. 한국사는 1920년대 신여성의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1900년대 근대 여성 이념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소개되었다고만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자매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가 양성한 여성상은 현모양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신마리아는 결혼했고, 박에스더는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독신으로 귀국해 활동했다. 박에스더는 외국 유학 경험으로 국제적 안목이 있었다. 김배세는 전문직 종사자로 독신으로 살았다. 이들은 당시 흔치 않은 여성들이었다. 세 자매의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려야 마땅한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첫 신여성들이었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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