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화된 새벽 기도회의 유래와 본질

토착화된 새벽 기도회의 유래와 본질

기사승인 [0호] 2015.10.13  15: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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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선주 장로와 그 친구들의 도교 수행에서 시작돼…불교나 무교와는 관계 없어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새벽 기도회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 기도회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 기도회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새벽 기도회는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된 게 아냐
여러 글이나 책을 보면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적혀 있다. 민간 무속에서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이나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부엌 음식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 기도회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 1894년 동대문. 당시에는 성 밖 주민이 성 안 주민보다 더 많았다.
도시의 파루와 사찰의 새벽종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의 새벽 파루와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와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년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절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저녁 8시), 이경(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 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성무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수도 승려끼리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 종소리와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을 만들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새벽 기도회와 달랐고, 따라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자면, 새벽 기도회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 시간이었다.
새벽 기도회가 여성들의 무교적 민속신앙에서 유래했을까
1905년 초 송도(개성)에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에는 새로 몇 사람이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 치성 사이에는 시공간·성격·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새벽 기도회는 선도에서 개종한 길선주와 평양 교인들이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민간 도교)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하던 새벽 기도·통성기도·철야 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 기도회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에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 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 기도회'는 장로교회의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 때 소규모로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1890~1905년, 사경회에서 시작한 새벽 기도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를 다스리는 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의 새벽 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 <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 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 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 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에서 이루어진 새벽 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 목사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대부분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목사와 조사 한석진의 가정 새벽 기도를 근거로, 선교사 마페트가 새벽 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 기도를 시작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 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 기도회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 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 모임,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 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 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일찍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1주일을 사경회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다. 개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 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 발전,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을 허물었다. 4대 문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에 보신각은 무용지물이라 폐쇄되었다. 서울은 영혼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京城)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 종을 3번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의 교회에서,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타종했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 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 기도회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 1909년 전주교회에서 종을 설치하기 위해 소달구지로 나르고 있다. 수직성을 확보한 종탑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전주 시의 시간이 성화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는 세속 성자들이 확보한 경계적 시공간 
성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서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회로 기독교화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 기도회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의 기도로 교회가 산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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