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본능
아지트 바르키·대니 브라워 지음
노태복 옮김/부키·1만8000원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나? 어디로 갈 것인가?
폴 고갱도 말년의 대작에 비슷한 제목을 붙였지만,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의과대학 석좌교수로 ‘인류 기원론에 관한 학문적 연구 및 교육센터(CARTA)’ 공동소장을 맡고 있는 아지트 바르키와 대니 브라워 공저 <부정 본능>(원제: DENIAL)은 인류의 이 영원한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류의 기원과 특성을 탐구하는 많은 진화생물학 분야 책들 중에서 이 책은 몇 가지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두뇌나 유전자 변이 같은 물적 조건의 특이성이 아니라 심리적 특성에서 찾는다. 접근방법도 다르다. 인간의 특성을 입증하는 진화상의 흔적 규명보다는 왜 다른 동물들은 인간만큼 똑똑해지지 못했는지, 그 진화 억제 메커니즘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든 것, 다른 동물들이 수천만년 동안 그 직전까지는 거듭 도달했으나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진화의 장벽,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부정하는 능력’이었다고 이 책은 얘기한다.
동물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개체성 인식 능력 여부를 조사하는 ‘거울 검사’ 결과, 기본적인 자기인식 능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 동물은 침팬지 외에 오랑우탄, 돌고래, 범고래, 코끼리, 제비(까마귀) 정도였다.
<부정 본능>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마음의 이론’이란 개념을 통해 단계별로 나누어 살핀다.
1단계는 동물들이 자신의 개체성을 인식하는 단계다. 거울 검사 등에서 대다수 동물들이 자기인식을 한다는 명백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 포유류와 조류가 이 단계(1차 상호주관성)에 도달한 것으로 관측됐다.
2단계는 자신의 개체성을 인식하는 동물들 중에 다른 개체들도 그들 자신만의 지각과 행동목표를 지닌 ‘의도적 행위자’임을 알아차리는 단계다. 아직은 다른 개체들의 자기인식 능력을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 초보적인 2차상호주관성 단계.
3단계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들도 자신과 같은 독립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걸 완전히 이해하는 단계로, 오직 인간만이 도달한 단계다. 즉 타인들도 완전한 자기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는 단계. 완전한 2차상호주관성 단계. 아울러 타자도 자신도 사실이 아닌 잘못된 믿음(자기기만)을 지닐 수 있다.
4단계는 자신 또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인지하고 이해하는 3차(또는 다차)상호주관성 단계.
이 4단계 중 오직 인간만이 3단계 이후로 나아갔다는 게 지은이들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애리조나대 분자세포생물학과장이었던 대니 브라워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단계로 진화할 수 있었던 원인을 인간 두뇌나 신체적 변이 특성에서 찾을 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인간처럼 되지 못하도록 진화를 억제한 장벽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쪽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장벽이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인 것’이라는 ‘결정적’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필요한 연구자료들을 남겼다. 이 책을 쓰기 전에 세상을 떠난 그가 공저자가 된 이유다.
다른 동물들을 가로막은 진화 장벽은 무엇인가?
바르키 교수는 전통적 주장인 뇌 변이 특성 등에서 그 답을 찾을 순 없다고 본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나온 것은 약 10만 년 전으로, 당시 5000~1만 명 정도였던 그들은 그 직전에 오늘날과 다름없이 탁월하게 똑똑한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인간의 뇌 크기는 그보다 훨씬 앞선 30만~40만 년 전에 이미 지금과 비슷한 크기가 돼 있었고, 코끼리나 고래는 인간보다 더 큰 뇌를 갖고 있다.(신체대비 뇌 크기 비중은 인간이 조금 더 크다) 도구도 인간만이 사용하는 건 아니다.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문자를 비롯한 언어나 협력양육, 유전자 특성도 인간에게 탁월성을 안겨 준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없다고 바르키 교수는 설명한다.
그 결정적 요인은 바로 자기인식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들도 각자 완전한 자기인식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는 것, 즉 3단계 이후 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바르키 교수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 중에도 이 3단계까지 간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단계에 도달한 동물들은 다른 개체들의 죽음을 목격·인식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죽음, 필멸성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그 때문에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린 그들은 자원과 짝을 얻기 위한 위험한 경쟁조차 회피한다. 그 단계의 개체들은 종 전체의 생존보다 자신의 생존, 즉 개체 생존을 우선하게 된다. 그 결과 자손 번식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할 뿐 아니라 짝짓기 상대로부터도 외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립 끝에 소멸된다.
결국 다른 동물들을 2단계 진화에 눌러앉힌 진화의 장벽은 이 죽음의 공포라는 ‘심리적 장벽’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이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었다. 그 장벽을 뛰어넘는 순간 인간의 능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다른 동물들과의 간격을 기하급수적으로 벌려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부정하는 능력’이다.
바르키 교수는 심리학 개념을 빌어 부정을 이렇게 정의한다. “부정이란 의식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사고, 감정 또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안을 누그러뜨리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다.”
현실부정(denial of reality)에 가깝다. 예컨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잊고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동차 안전띠를 매지 않고 오토바이 헬멧도 착용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고 육식을 하며 음주운전이나 운전중 문자 보내기를 한다. 죽을 가능성이 높은 줄 알면서도 전쟁터에 나가고 암벽등반이나 스카이다이빙을 감행한다. 현실·필멸성을 부정하는 이런 자기기만은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진화론 자체를 거부하고 절대자의 지적설계론에 집착하게 한다. 종교도 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의 연장이다. 현실정치나 사회의 양극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부정 능력이 현실에서 부정적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암 투병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 불가능할 것이라던 간디의 비폭력 저항과 스티브 잡스의 성공을 가능케 했고, 체코의 육상 영웅 자토펙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외부현실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명상도 현실부정이며 불교의 좌선이나 열반도 완벽한 현실부정이라고 볼 수 있단다.
인간의 현실·필멸성 부정이 유전적 흔적을 남기고 신경학적 메커니즘으로 정착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던진 능력자의 출현 가능성이 극히 낮은 데다 복수의 그런 개체들이 동시에 출현해 자손을 남길 확률은 훨씬 더 낮다. 그래서 저자들은 “지구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그 사건의 자식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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