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하나님"(God Who Sees) | ||||||||||||||||||||||||||||||||||||||||||||||||||
[설교] 김영봉 목사, '성지묵상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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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 Aviv)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면서 우리는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출국할 때 덜레스 공항에서 필요한 모든 안전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 정부에서 설치한 안전 검사대를 또 한 번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전 요원들의 안전 검사는 미국 공항에서 하는 것보다 더 철저했고 또한 삼엄했습니다. 첫 관문에서부터 '과연 특별한 나라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을 돌아보면서 그곳이 인류의 가장 위험한 화약고라고 불리는 이유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에는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 그리고 웨스트 뱅크 지역을 점령합니다(그림3). 이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인접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왔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과 여러 서방 국가들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1978년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에 따라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넘겨주었고, 2005년에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의 갈등으로 인해 이 문제는 여전히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는 땅은 두 구역으로 즉 유대인 구역과 팔레스타인 구역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구역을 나누어 공존하고 있고, 이스라엘 땅 전체가 그렇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이스라엘 정부에서 장벽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긴장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2. 더 진도를 나가기 전에 이 지점에서 약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아랍권에 대해 혹은 중동 문제에 대해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Palestine): 우리가 '가나안' 혹은 '이스라엘' 땅이라고 알고 있는 지역, 즉 요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주후 138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하드리안 황제가 유대적인 색채를 지우기 위해 이 이름을 붙인 후에 지금까지 공식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Palestinians): 오래도록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다양한 종족이 뒤섞여 살았던 곳이어서 어느 하나의 인종의 후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7세기 이후에 무슬림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아랍권이고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이 다수입니다. 이들 중에는 여전히 팔레스타인 땅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나라에 피신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과 '6일 전쟁'을 통해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20%가 넘었는데, 박해로 인해 자꾸 이주하여 지금은 5% 정도만 남았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Arabs): 원래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아랍 문화권에서 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랍인은 인종을 가리키는 말도, 종교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아랍인들은 다수가 무슬림이지만, 그들 중에는 유대교인도 있고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7세기 이후에 무슬림이 중동과 아프리카를 점령한 결과로 인해 아랍어가 공용어로 확산되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아랍어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슬림(Muslim):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랍인들 중에 무슬림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를 따르는 아랍인들도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유다는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됩니다. 주후 135년에 또 다른 유대인 반란이 일어나 국가 재건을 꾀했지만 하드리안 황제에게 잔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는 유대인들도 지속적인 박해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가나안 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주후 7세기에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슬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다수가 무슬림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영국으로 바뀝니다. 이 때로부터 서방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갑니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급증하게 됩니다. 그것을 '시온주의'(Zionist Movement)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한 논의가 되었고, 마침내 유엔 총회의 결의에 힘입어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다시 생겨났습니다. 유대인들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땅을 되찾는 것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편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수천 년을 대를 이어 살던 땅에 낯선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이 땅은 우리 조상이 살던 땅이니 물러가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것도 최신식 무기로 밀고 들어와 학살하고 밀어낸다면, 그것을 당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내몰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멀리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난민으로 살아가거나, 팔레스타인 땅 안에 있는 자치 지구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중동의 사태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목사님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에 대해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요 축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만행에는 너그럽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미국 교회에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설교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지순례 중에도 유대인들의 뛰어난 점에 대해서만 감탄하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한숨과 절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머무는 며칠 동안 저는 유대인들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탄 버스 기사도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머물렀던 호텔에서 시중드는 사람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방문하는 곳마다 값싼 기념품을 들고, 관광객에서 배운 짧은 한국말로 "싸다, 싸! 한 개 1 달라!" 하고 외치는 사람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말을 하는 것이 신기해서 "에이, 비싼데!" 하고 지나갔더니 제 등 뒤에서 외칩니다. "아냐! 싸다, 싸!" 3. 그렇기 때문에 성지 순례는 우리를 아주 어려운 질문 앞에 세웁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의 갈등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할까? 기독교인은 항상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지원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관해 지난주와 오늘 연이어 읽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게는 너그럽고 팔레스타인 사람들 혹은 아랍인들에게는 묘한 거리감 혹은 적대감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가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창세기 16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자신에게서 아이가 생기지 않고 나이는 자꾸 들어가자 사래가 하갈에게 부탁하여 대리모의 역할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 하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하갈은 학대에 못 이겨 집을 뛰쳐나갑니다. 브엘세바와 이집트 사이의 광야를 정신없이 헤매다가 하갈은 샘물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시면서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로부터 약 16년 정도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건은 이삭이 젖을 뗄 때 즈음에 일어납니다. 옛날에는 두세 살까지 젖을 먹었으니 이스마엘이 열여섯 쯤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준 후의 일입니다.) 그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됩니다. (사래도 사라라는 새 이름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사라가 아닙니다. 사라는 또 다시 아브라함을 들볶습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으로 하면, 이스마엘이 첫째 아들이므로 자기 아들 이삭보다 더 많은 유산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 아들 이삭에게 큰 해가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하라는 대로 무엇이든 하는 아브라함이었지만 이번에는 주저하며 고민했습니다. 11절에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라의 청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또 아무 말 없이 다음 날 일찍 먹거리 얼마와 한 가죽부대의 물을 하갈에게 주고 내어 보냅니다. 집을 나온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14절)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먹거리도 떨어지고 물도 다 떨어집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스마엘이 어머니보다 먼저 탈진했습니다. 하갈은 아들을 덤불 아래에 뉘어 놓습니다. 15절에 "뉘어 놓았다"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던져 놓았다"는 뜻입니다. 시체를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하갈은 이스마엘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갈은 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 참았던 통곡을 쏟아 놓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방성대곡했다"고 번역했습니다. 목 놓아 울었다는 뜻입니다. 하갈은 아들에게 자신의 울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광야와 사막에서는 저 멀리에서 나는 소리도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죽어가고 있던 이스마엘이 어미의 통곡을 듣습니다. 그는 덤불 아래 누워 신음으로 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17-18절) 그 음성을 듣고 울음을 그쳤을 때, 하갈의 눈에 샘이 보였습니다. 눈물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샘물을 길어다 먹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힘을 되찾았고, 바란 광야에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약속한 대로 이스마엘을 지켜 주셔서 그에게서 큰 민족으로 커가게 하셨습니다. 20절은 그 대목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4. 벌써 몇 년 전입니다만, 어느 날, 어느 교우께서 제게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속회에서 창세기를 읽으며 공부하고 있는데, 이스마엘에 관한 부분을 읽고 의문이 생겨서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 때까지,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저주받아 내쫓김을 당했고, 그로 인해 그 후손인 아랍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창세기를 읽어 보니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랍인들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번성시켜 주신 민족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한국과 미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잘 보여줍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오해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가르칩니다. 무슬림의 조상이라고도 가르칩니다. 마호메트 자신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아랍인들을 규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하여 아랍인 전체를 공적(公敵)으로 묶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아랍인'이라는 말은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아랍어를 쓰는 사람 혹은 아랍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도 아니고, 무슬림의 조상도 아닙니다. 마호메트가 실제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고, 설사 그렇다 해도 이스마엘이 무슬림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랍인에 속하는 수많은 인종의 하나입니다. 둘째, 이스마엘과 그 후손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오해합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을 제대로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7장에도 또 한 번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탄생을 예고하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18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반드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하고, 그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에게서 열두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20절). 이렇듯, 이스마엘을 축복하시고 큰 민족으로 불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이 16장, 17장 그리고 21장에 세 번이나 나오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눈 질끈 감고, 이스마엘은 저주받은 자식이며, 그 후손인 아랍인들도 저주 받아 마땅하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이스라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주신 예언이 축복의 예언이 아니라 저주의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16장 12절이 문제의 구절입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번역만으로 보면, 이스마엘의 후손이 가는 데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테러범이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보입니다.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전제하고 이 번역을 읽으면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읽었던 '개역성경'의 번역은 더욱 험악합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이 구절은 구약 성경 중에서도 가장 번역하기에 모호한 구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인들 특히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선입견이 이 구절의 번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12절을 번역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너의 아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들나귀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손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손이 그에게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함께 살 것이다. (And he will be a wild ass of a man. His hand against all, the hand of all against him. He will dwell in the presence of all his kin.) '들 나귀'처럼 살게 된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만, 테러 분자가 될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립적인 학자들은 '들나귀처럼 산다'는 말이 '강인하고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뜻으로 풉니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로, 요르단에서 만난 베두인 즉 유목민들은 들 나귀처럼 강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선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5.
자, 이제 몇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무슬림의 조상은 더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또한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도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의 갈등을 보면서 무조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는 안 되며, 아랍인들을 저주받은 민족으로 혹은 잠재적인 테러분자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민족을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 판단하고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이 이야기에서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상한 처사를 거듭 만나게 됩니다. 사래의 핍박을 못 이겨 가출한 하갈에게 다시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도 지나친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알겠는데,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처사가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얼굴이 반반한 것 외에는 별로 칭찬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도 부족했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았으며, 야박하고 잔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를 탓하지 않으시고 그 뜻을 받아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면서 먹거리 조금과 물 한 자루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20년 넘게 일한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는 법은 없습니다. 사건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처사는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힘있는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 눌리고 쫓기고 털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입니다. 아니, 때로는 불의한 사람들 편에 서 계신 것 같습니다. 눌리고 쫓기고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더 큰 고난을 감당하도록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사는 참으로 부조리하고, 하나님은 무능하시거나 무관심해 보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사라와 같고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당했던 것과 같이 억울하고 부당하고 피눈물 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명명백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그렇게 똑 부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무력해 보이고, 때로 가진 자의 편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억울하게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사라의 집처럼 혹은 이스라엘 땅처럼 불의가 판치고 그로 인해 흐르는 피눈물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실수와 악행과 눈물과 한숨을 엮어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런 처사들을 통해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브라함에게, 하갈에게 그리고 이스마엘에게, 각각 세워두신 특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야박한 사라와 무능한 아브라함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것이 그들을 들 나귀처럼 단련시켜서 또 하나의 민족으로 자라가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시다'(God hears)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하갈의 통곡을 들으셨고, 또한 이스마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요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때로는 모르시는 것 같고 때로는 무심한 것 같고 또 때로는 편애하시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십니다. 사라의 불의를 묵인하시는 것 같지만,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생각으로 그 때는 잠시 묵인하신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사라처럼 탐욕에 눈 어두워 이웃을 힘겹게 할 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무심하게 악한 말을 할 때,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이웃의 아픔에 침묵하거나 모른 척 할 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이 못 보시거나 못 들으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 보고 계시며 다 듣고 계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로잡는 손길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하갈처럼 힘있는 사람들에게 눌리고 밀리고 빼앗길 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스마엘처럼 다른 사람의 악의로 인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뜨거운 눈물 흘리며 슬피 울 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당장 하나님이 행동하지 않으신다 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심하다고, 하나님은 정의를 모르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꿎게 고난 당할 때, '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견디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보시는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라의 집과 같고 이스라엘 땅과 같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잇속만 챙기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귀로 이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탐욕과 폭력을 눈 여겨 보고, 힘 없는 이들의 한숨과 통곡을 귀담아 듣습니다. 그 마음으로 성지 순례를 합니다. 그 마음으로 필리핀의 재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살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그 자신도 정의롭게 살 뿐 아니라 이 세상이 더 정의로워지게 만들기 위해서 헌신합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한 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돌아보고 허락하신 복을 헤아려 보며 감사하는 때입니다. 보시는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그분이 다 보고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겸손히 서서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무릎 꿇고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도록! 누구를 만나든 주님으로 섬기도록!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복된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보시는 주님, 들으시는 주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주님, 저희 각자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시는 주님, 저희에게 이 믿음을 주시어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시고 인생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주님께서 왕이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아멘. 김영봉 목사 / 와싱통한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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