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


인터뷰] 전인권 “한때는 매일 죽음만 생각…이젠 하루가 아쉽고 긴장”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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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4시, 그는 대학로 학림다방에 들어섰다. 약속시간 그대로 ‘칼 타임’이었다. 지난해 재결합한 아내 정혜영씨(55)가 같이 나왔다. 늘 입고 다니던 검정색이 아닌 잿빛 재킷을 걸치고, 사방으로 뻗치던 사자머리 대신 하얗게 센 긴 머리를 뒤로 모아 묶고 있었다. 검정색 선글라스와 수염은 그대로였다.

가수 전인권씨(58). 1981년 결성된 록밴드 ‘들국화’의 리드보컬이다. 1980년대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그는 언더그라운드의 대명사였다.

그의 삶은 스스로의 표현처럼 ‘말썽과 굴곡’으로 점철됐다. 마약 스캔들이 되풀이됐고 2005년 자살한 배우 이은주씨와의 염문설도 파문을 낳았다. ‘한국 록의 전설’이면서 바람 잘 날 없던 가요계의 이단아였다.
들국화가 1987년 공식 해체된 후 25년 만에 모여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고, 건강과 가정도 안정을 되찾은 까닭일까. 표정이 무척 밝았다. 2007년 종적을 감췄다가 5년 만에 나타난 설렘과 흥분도 남아 있었다.

21일 부산 KBS홀에서 투어콘서트 피날레를 하는 그는 “나 같은 놈도 (많은 것을) 극복했다”며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했다.


▲ 나 같은 놈도 수많은 아픔 극복
삶이 버거운 이들에 힘 주고 싶어


▲ 요양원서 나와 마약 끊으려 금주
‘이은주’ 얘기는 다음에 하겠다


▲ 쌍용차·MBC 노조 콘서트 참가
약자 돕는 데 좌·우가 어디 있나


- 들국화 투어콘서트가 대구와 서울에서 있었죠.

“감동적이었어요. 관객분들이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노래를 열심히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어요. 연령대도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해 놀랐고요. 말썽 많은 전인권인데도요. 그 생각이 나네요. 들국화를 재결성키로 하고 (최)성원(베이스)이가 사는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열여덟 살 먹은 여자애가 사인해달라며 오길래 ‘너, 나 알아?’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대한민국 문제아 전인권씨잖아요’라고 하더라고요. 한참 웃었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마약환자라고 하지 않고 문제아라고 했으니까요. 하하하….”

- 데뷔 때 생각이 많이 나겠어요.

“들국화 결성 후 1985년 1집 앨범으로 데뷔하기까지 4년간 우린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 같은 밤업소에서 주로 팝송을 부르며 먹고살았어요. 무지 고생했죠. 방송국 진입은 엄두도 못냈어요. 당시 방송국 PD들이 우리 노래를 들었다면 ‘창법 미숙’이라고 했을 걸요(웃음). 그런데 손님들은 우리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어느 날 새벽 밤업소에서 성원이가 만든 ‘제발’과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렀더니, 처음 듣는 곡임에도 반응이 열광적이었어요. 우린 자신감을 갖고 앨범을 내기로 했죠. 그래도 그렇게 터질 줄은 몰랐어요.(1집 앨범은 2007년 음악전문가들이 꼽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위에 올랐다)”

- 들국화가 몇번의 공연만 하고 또 해체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어요. 전성기 때처럼 신곡을 발표할 계획도 있나요.

“뭉치기 쉽지 않아서 그렇지 우린 한번 뭉치면 절대 시시하게 하진 않아요. 연습하면서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었어요. 우리가 1987년 해체된 건 성원이와 나의 음악적 견해차나 돈 때문이 아니었어요. 둘 다 질투심이 많아서였죠. 그런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질투도 없어요. 대신 하루를 진짜 아쉬워하면서 긴장하며 살고 있죠. 우리는 신곡 내서 히트하려고 재결합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음악 하면서 같이 놀려고 만난 거예요. 신곡도 신나게 노는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지금 성원이와 제가 완성해놓은 곡이 몇곡 있어요. 곡들이 쌓이면 당연히 새 앨범도 발표할 거예요.”

- 재결성에 최성원씨와 주찬권씨(드럼)는 합류했지만 1집 멤버인 조덕환씨(기타)는 함께하지 않았는데요.

“덕환이는 자기 입장과 개성이 강한 친구예요. 솔로활동을 많이 했죠. 음악적 지향점이 저와 다른 점도 있고요. 같이하기 위해 계속 조율 중이에요.”

-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옛날엔 소리를 많이 질렀는데 요즘엔 하루종일 노래를 듣고 생각하고 연습해요. 폴 매카트니부터 지미 헨드릭스, 로버트 플랜트, 레드 제플린 같은 좋은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듣고 그들의 표현방법을 따라해보죠.”

그의 음악을 여러 번 끊고 위협했던 마약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마약으로 다섯 차례나 수감됐다. 처음 검거된 것은 들국화가 한창 활동하던 1987년 10월이었다. 아내 정혜영씨가 거든다. 그날이 전씨의 생일이어서 미역국을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씨는 “연습실에서 허성욱(건반·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과 같이 잡혀갔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2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44일 만에 감옥에서 나왔다.

- 마약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음악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하고 싶어서 했어요. 전 청소년기에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선 왜 공부만 하라고 하느냐고 대들었다가 선생님께 일곱대 두들겨 맞고 자퇴했어요. 그 후 밴드하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삼청공원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 대마초도 배웠죠. 엄마 속 무지 썩였어요. 담임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오라고 하니까 엄마가 제게 빌기까지 했는데, 돌아가지 않았거든요.”

마약은 질기게 되풀이됐다. 전씨는 “4~6년마다 (감방에) 들어가면서 다행히 누범은 면했다”고 말한다. 누범은 금고 이상 형을 받고 그 집행이 끝났거나 면제받은 후 3년 내에 다시 금고 이상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누범일 경우 형이 가중된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은 것도 마약 때문이었다. 1999년 4번째 붙잡혔을 때 강 전 장관이 그의 변호인이었다. 강 전 장관은 ‘아침이슬’로 유명한 가수 김민기씨를 법정 증인으로 세워 공연 때문에 전씨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증언케 했다. 덕분에 10개월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강 전 장관과 지금도 연을 이어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친했는데, 내가 약을 또 해서 너무 많은 사람을 배신했다. 그래서 강 전 장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어느 날 마약하고 앉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음악하려고 마약하는 건지, 마약하려고 음악하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필로폰 투약 혐의로 다섯번째 검거된 2007년 9월 그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소 후 가수로 복귀할 생각을 했으나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치료를 위해 복용한 모르핀에 서서히 중독돼갔다. 그는 “처음에 두세 알 먹던 걸 치기어린 반항심에 나중엔 80알씩 먹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 약을 먹으려는 찰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 다섯명이 집에 들이닥쳐 그를 번쩍 들었다. 병원차에 태워 전남 담양의 어느 요양원에 내려놓았다. 당시 헤어져 살던 아내 정씨가 요청한 일이었다.

“남자들이 들이닥쳤을 땐 천둥번개가 친 것 이상으로 놀랐죠(웃음). 제가 차 안에서 몸부림치니까 병원에서 온 거라고 얘기해주더라고요. 전에도 끌려가 3개월간 요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3개월만 있다 나오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웬걸, 1년6개월이나 있었어요.”

- 요양원 생활은 어땠나요.

“절망보다 더 지독한 지옥을 경험했지요. 새벽 5시에 불이 켜지면 모두 일어나서 6시쯤 쭉 늘어선 채 약을 받았어요. 전 혈압약을 받았죠. 그리곤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오감이 망가져서 밥도 먹기 싫었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요. 안 먹으면 강제로 먹게 하니까 겨우 죽 몇 술을 뜨곤 했어요. 화장실도 기어서 갔고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어서 8개월 동안은 매일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세상에, 내가 잘못했다지만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나, 차라리 죽이시지’라고 원망했어요.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이클 잭슨이 부러웠죠.”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삶에 대한 옅은 의지라도 생긴 건 8개월쯤 지나서였다.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눈빛으로…’(들국화 ‘그것만이 내 세상’ 중) 가사가 섬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10개월이 지난 작년 9월 초 아내는 그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전씨가 애지중지하는 딸 인영씨(29)의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아내에게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냐. 앞으로 난 혼자 살아야 할 텐데 지금 당신이 잘해주면 내가 더 힘들어지니 당신은 당신 길로 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 하더라고요. 그 말이 제겐 신앙이 됐어요. 우리 애들에게 난 너무 나쁜 놈이에요.결혼식장에 인영이 손 잡고 들어가면서 맹세했어요. ‘두고봐. 아빠, 꼭 잘될게’라고요. 딸이 무지 좋아하죠. 아들 진환이는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있는데, 음악가 기질이 다분해요. 하하하….”

그는 요즘 맥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마약도 못 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내가 감히 한 인간에게 마약을 하라 마라 할 순 없지만 뼈와 이가 많이 상하니 조심하라는 말은 하고 싶다”고 농을 섞어 말했다. 그도 “임플란트를 14개나 했다”고 한다.

배우 이은주씨 파문을 떠올렸다.(전씨는 2005년 이씨 사망 후 “4년 동안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언론에 밝혔다가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다시는 1000만 안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좀 더 튼튼해지면 다음에 꼭 속시원하게 다 이야기하겠다”며 말을 중간에 접었다.

그에게 선글라스는 신체의 일부와 같다. 집에 누가 찾아오면 제일 먼저 찾아 쓰는 것도 선글라스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초청을 받고 갔다가 “선글라스를 빼라”는 경호원의 요구에 불응하고 선글라스를 낀 채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만나는 상대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백 소장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 백 소장과는 어떤 인연이세요.

“2003년쯤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의 노래’ 공연에서 김정환 시인 소개로 처음 뵀어요. 백 선생님이야말로 세계인의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선생님은 제가 경기도 평택 대추리 강제철거 반대 콘서트 할 때도 오셔서 격려해주셨어요. 또 감옥에 있을 때는 매달 편지와 함께 영치금을 넣어주셨죠. 절 잊지 않고 계시다는 마음을 전달하신 거예요.”

- 그러고보면 요즘도 들국화가 시위 현장 공연에 자주 가는데요. 얼마 전 MBC노조 파업 콘서트에 참가했고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제주 강정마을을 위한 콘서트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쌍용차 일정은 아직 안 나왔고, 강정마을엔 8월4일 내려가요. 우리 음악이 도움된다면 당연히 해야죠. 하지만 이런 활동을 한다고 무조건 좌파연예인으로 모는 시각은 못마땅해요. 통일을 염원하고 바른 목소리를 내거나 억울한 이들을 돕는 일에 좌파, 우파가 어딨어요.”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뭔지 물었다.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다만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어요. 나 같은 놈도 극복했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꼭 이겨내라고요. 하지만 이때 너무 발버둥치지 말라고도 얘기하고 싶어요. 바다에 빠졌을 때 살려고 온몸으로 버둥거리면 죽지만, 그냥 흐름에 몸을 내맡기면 어느새 몸이 수면 위로 떠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대화를 마치면서 그가 부른 1집 앨범 ‘행진’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중략)/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중략)/ 난 노래 할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27년 전의 전인권씨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부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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