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딘버러 선교대회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림으로 모트의 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대의원도 1,200명이 등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선교회나 선교단체도 무려 160개나 참석하여 큰 호응을 보였다.

근대선교운동의 아버지인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1792년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를 결성하고 인도로 파송 받은 이후 교단 선교회나 선교단체가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하여 개신교 선교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선교사들의 과다 경쟁과 사역 중복은 오히려 화근이 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감리교 평신도였던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는 젊은 시절부터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과 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MCA)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세계여행을 두 번씩이나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선교의 흐름과 방향에 눈을 뜨게 하였고 연합과 일치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존 모트는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280만 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교회와 선교단체가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서로 연합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 그는 인도, 중국, 일본, 브라질,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등지를 방문하였고, 한국 역시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특별히 1907년 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을 방문하면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연합과 일치의 정신은 마침내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림으로 모트의 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대의원도 1,200명이 등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선교회나 선교단체도 무려 160개나 참석하여 큰 호응을 보였다. 감사한 것은 한국대표도 15명이나 참석해 초기한국교회의 선교를 상세하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한국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아담스(James E. Adams), 에비슨(O. R. Avison), 버크몰(H. O. T. Burkmall), 푸트(W. R. Foote), 포사이더(W. H. Forsythe), 게일(James S. Gale), 질레트(P. L. Gillett), 해리스(M. C. Harris), 존스(George Heber Jones), 녹스(Robert Knox), 마펫(S. A. Moffett), 레이드(W. T. Reid), 롭(Alex F. Robb), 언더우드(H. G. Underwood), 윤치호(T. H. Yun)이다. 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Report of Commission I: 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10), 374.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개최 배경

1900년 뉴욕대회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년 초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 리빙스톤 선교회의 명예 사무총장인 페어리 댈리(Fairley Daly) 목사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국 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대회를 하나로 묶어 선교사대회를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1910년 최초로 세계선교사대회를 미국 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기로 하고 첫 모임을 1906년 11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가졌다. 1907년 6월 12일에 37개의 선교단체가 동참할 것을 표시하였고, 이때 실행위원회가 구성되어 두 명을 먼저 임명하였는데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의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재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과 스코틀랜드교회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완(A. B. Wann)이었다. 이후 모임에서 실행위원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보강되어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가치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실행위원회에서는 뉴욕대회의 ‘선교동원’ 차원처럼 참석자들로 하여금 선교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일치를 모았고, 자신들의 목적은 선교사리더 중심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교지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토론하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청받은 선교단체는 주로 영국미국과 유럽대륙, 그리고 기타 단체들인데 자신들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대회가 아니라 대회의 목적은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짓고 세 가지 의미가 충족되기를 바랬다:
(1) 교회로 하여금 모든 나라에 복음전하는 일에 헌신토록 눈을 뜨게 하는 것;
(2) 이러한 과업에 크리스천들이 연합의 정신으로 참여하는 것;
(3) 선교사대회가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토록 하는 것.

그래서 선교전략지도 인도, 극동지역(한국, 중국일본몽골 등), 이슬람권으로 제한하고 이들 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선교보고를 받고 함께 토론하여 복음의 접촉점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종전의 선교사대회와는 달리 에딘버러대회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 연합하였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회를 준비하였다. 사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윌리암 케리가 더 이상 경쟁하지 말고 함께 연합해야 상생할 수 있음을 깨닫고,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18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열기로 제의한지 꼭 100년 만에 이루어졌다. ‘경쟁’ 선교를 뛰어넘어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세계최초의 선교사대회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것이다.

 
대회의 주제

1.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주제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다. 선교의 긴박성과 참여를 촉구하는 이 주제는 원래 학생자원선교운동의 구호였다. 1886년 무디의 헐몬산 학생대회 때 로버트 윌더(Robert P. Wilder) 선교사가 100명의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선교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 학생자원선교운동을 태동시켰고, 이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존 모트였다. 모트는 젊은 대학시절부터 조직력과 리더십이 탁월해 1888년에는 학생자원선교운동의 의장이 되어 대학생들의 선교동원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생자원선교운동의 놀라운 결실이라면 자신들의 구호처럼 1890년부터 1940년까지 개신교 선교의 꽃을 피우게 하였고, 그 예가 1939년까지 약 2만 5천 명의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헌신케 하였다. 스테반 니일(Stephen Neil) 박사는「기독교 세계선교 사전」(Concise Dictiona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에서 학생자원선교운동이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이끄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모트는 또한 세계기독학생연합(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WSCF)과 YMCA 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의 선교동참에 불을 지폈다. 이처럼 모트는 일생을 ‘학생 복음전도자’로서 삶을 바치다보니 자연스럽게 세계복음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 때 기독교 세계 교회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공식 메시지에서 모트의 세계복음화에 관한 강한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 복음화를 우리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큰 신뢰와 전능하신 힘에 대한 응답으로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탁은 우리 선교사들이나 선교단체나 또는 이 대회의 우리 회원들에게만 위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기독교인 가정, 나아가서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의무로 지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기초적인 덕목들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위임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는 전천년주의 종말론 신앙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이란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환란전 휴거, 문자영감설을 믿고 세계복음화의 절박성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 사상에 빠진 서구 선교사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의 말씀을 실현하는데 앞장서게 하였고, 당시 제국주의 선교도 한 몫을 감당하였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의장인 모트는 학생자원선교운동 출신으로 전천년주의 신앙의 핵심이었고, 그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실 19세기 말경 학생자원선교운동, 무디부흥운동, 나이아가라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 NBC)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대다수가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을 지니고 있어서 오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상당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날 창의적접근지역(Creative Access Nations, CAN)과 같은 위험하거나 열악한 지역에서 선교하는 자들이 많았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에 참여한 1,200명의 대의원 가운데 선교단체 출신 선교사들은 대다수가 비기독교국가에서 사역하는 자들이었는데 요즈음으로 말하면 World A 지역 선교사들이었다. 이 사실을 제1주제인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에서 보고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주제 위원회가 지정한 비기독교국가는 일본, 대만, 한국, 중국태국말레이시아, 화란령 동인도필리핀, 호주 및 오세아니아인도스리랑카, 동부 지중해연안, 중앙아시아아프리카였는데 당시 에딘버러대회에 참석한 선교사들이 이곳 출신들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 대표로 참석한 마펫과 게일 선교사는 전천년주의 사상으로 꽉 차 있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이 묻어있는 100만인 구령운동(1909-1910)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달된 지 불과 25년 밖에 안 된 나라가 전체 인구 960만 명 가운데 100만 명 구령운동을 추진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100만 명 구령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은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에 박차를 가하는데 일조를 담당하였다.

 
대회의 준비 및 운영

1. 준비 과정 및 8개 주제위원회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준비하는 대의원들은 전혀 새로운 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02년 인도 마드라스 10주년 선교대회와 1907년 상해의 중국선교 100주년 대회와 1908년 옥스퍼드 국제회의에서의 경험은 에딘버러대회를 충분히 잘 치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에딘버러 실행위원회는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짜면서 불필요한 것들은 없애고 명쾌한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탁월하였다. 이들은 2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면서 8개의 주제를 선택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각 위원회는 20명으로 제한하여 전체 160명을 구성하였는데 모두가 미국영국, 대륙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에딘버러대회는 백인 선교사대회라 할 수 있다. 제1위원회는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로 존 모트가 의장을 맡았다. 위원회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의 편집장인 마샬 브룸홀(Marshall Broomhall)과 진젠돌프 백작이 설립한 헤른후트(Herrnhut)의 라 트로베(La Trobe) 주교였다. 제2위원회는 ‘선교지 교회 위원회’로 33년간 중국 선교경험이 있는 깁슨(Gibson) 박사가 의장을 맡았는데 그는 베테랑 선교사로 선교지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분과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제3위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육 관계 위원회’로 고어(Gore) 박사가 의장이었다. 그는 지적인 추구가 대단한 플라톤주의자로 본국에서 선교사의 종교교육에 커다란 열정을 지닌 자였다. 부위원장은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무어(Edward C. Moore) 박사가 맡았다. 제4위원회는 ‘타종교에 대한 선교사 메시지 위원회’로 의장은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연합자유교회대학의 케언즈(Cairns) 교수가 맡았다. 제4위원회 가운데 특별한 사람은 서든침례신학교의 4대 총장인 멀린스(E. Y. Mullens) 박사였다. 제5위원회는 ‘선교사 준비 위원회’로 핫포드 신학교 총장인 멕킨지(W. Douglas Mackenzie) 박사가 의장을 맡았고, 제6위원회는 ‘선교단체의 국내본부 위원회’로 의장은 바튼(James L. Barton) 박사인데 여성들도 두 사람이나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7위원회는 ‘선교와 정부와의 관계 위원회’로 버레이의 발포(Balfour of Burleigh)가 의장을, 제8위원회는 ‘연합과 일치 추진 위원회’로 프레이저(Andrew Fraser)가 의장을 맡았는데 그는 인도인으로서 인도의 정치와 행정권 내에서 학문을 하였기에 연합과 일치의 원칙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제8위원회에는 당시 저명한 독일 할레 대학교의 바르넥(Warneck) 교수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질의서는 각 대의원들에게 대회가 열리기 1년 4개월 전에 전달되었는데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하였다:
(1) 먼 지역의 대의원들까지 정확하게 질의서를 전달하는 것;
(2) 교리적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
(3) 선교사의 생활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나 열병과 같은 스트레스를 대처해 나가는 것;
(4) 질의서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적어도 대회 두 달 전까지 자료를 발송하는 것.
이처럼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치밀하게 준비되어 8개 주제위원회와 8명의 위원장 그리고 1,200명의 대의원들이 대거 참석하여 범세계적인 대회로 개최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2. 대회 장소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세계의 국가들과 백성들에게 아덴(Athens) 이상으로 영적인 파워를 형성하는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 대회였다”고 한다. 이 대회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뉴칼리지 연합자유교회 대회의장인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에서 열렸고, 이곳에서의 모든 모임은 존 모트가 의장을 맡아 진행하였다. 반면에 선교와 관련된 본국 사역자, 즉 목사, 평신도, 사역자, 여성선교사역 전문가, 청소년사역 전문가들을 위한 특별모임은 대회장에서 약간 떨어진 다른 회의장소인 시나드 홀(Synod Hall)에서 열렸다. 시나드 홀의 모임은 대회의장보다 하루 늦은 6월 15일에 시작해서 어셈블리 홈과 같은 날 23일에 마쳤는데 시나드 홀에서 논의된 주요 주제 10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중국인도 선교의 장벽;
(2) 이슬람의 장벽과 아프리카와 비기독교 세계의 장벽;
(3) 그룹토의-사역자, 평신도, 여성사역자;
(4) 그룹토의-유대인 선교, 어린이 사역;
(5) 그룹토의-성서공회와 문서사역, 어린이 선교훈련 사역;
(6) 초기선교역사 교육-1세기 기독교 확장, 대영제국의 선교;
(7) 민족 문제와 관련된 선교-현대세계의 연합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의 연합;
(8) 남성모임-현대과학과 선교, 상업과 선교;
(9) 여성모임-여성이 선교사역에 미친 공헌;
(10) 교회의 선교.

3. 개회식

개회식은 1910년 6월 14일(화) 저녁에 대회의장인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은 교회가 서있고,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에 의미가 더욱 깊은 곳이었다.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가 홀에 들어서자 세 명의 연설자들도 함께 뒤 따랐다. 대회장은 “신사여러분, 저는 위대하신 왕으로부터 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의심할 바 없이 위엄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선포하자 대회는 시작되었다. 대회장이 왕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오늘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선교사대회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 .” 왕의 메시지가 전달 된 이후에 세 명의 연설자, 즉 대회장, 캔터베리의 대주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가 연설을 하였는데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는 선교사대회 기간 동안 무엇보다도 일치(unity)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개회식 때 특별한 사항이라면 독일 식민성(植民省)이 에딘버러대회에 보낸 메시지이고, 그 다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에딘버러대회 의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일치를 촉구하였다: “기독교 사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크리스천간의 연합 정신은 교리의 차이점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의 차이점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교리의 차이점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4. 주요 대의원 및 한국선교 보고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2년의 준비 끝에 1,200명의 대의원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게 해외 선교사들이나 국내 선교 행정가들인데 대게는 전문가들이지만 몇몇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들도 있었다. 에딘버러 대회에는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교회 대표자들은 참석지 못하였다. 특별히 대륙 대의원들은 탁월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독일과 모라비안 형제회와 그 외 화란, 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프랑스벨기에에서 많이 왔다. 참석자들 가운데 유명한 학자들도 있었는데 독일 할레대학교의 바르넥 교수는 몸이 너무 쇠약해서 대회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대의원들에게 중요한 글을 써서 에딘버러 대회의 중요성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 외 선교역사학자로 유명한 쥴리우스 리히터(Julius Richter) 박사와 독일 베를린 해외선교회의 선교상담전문가인 베르너(Berner) 박사도 있었다. 더욱이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에는 남성 못지않게 여성 대표들도 참석하여 각 위원회에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한국대표로는 15명이 참석했는데 제1위원회의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는 한국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을 소개하였다. 당시 한국은 960만 명의 인구가운데 20만 명의 성도로 급성장하였다. 개신교가 소개된 지 불과 25년 만에 2.1%의 성도를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은 한국에서의 주요 사역을 보고하였는데 초기한국교회에는 해외의 8개 교단이 선교활동을 하였고, 307명의 선교사와 23개의 선교부가 있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경우 16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가 2,500명이나 되고, 수요기도회에만 1,100명이 참석하였다. 특히 한국교회가 헌금하는 일에 열정적이어서 연간 2만 5천 파운드가 넘는 액수를 헌금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가장 적은 동전 한 닢은 영국 페니의 1/4 가치라고 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 성도들은 또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소를 파는 자도 있었고, 자기 집을 저당 잡아 융자금을 받은 뒤 이 융자금을 교회 짓는데 드리는 자도 있었다.

윤치호와 사무엘 마펫은 대회의장에서 열린 토론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보고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은 이제 “위대한 추수의 때”가 도래하였다며 25년 전에는 단 한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크리스천도 없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으로 20만 명의 성도로 성장하였고, 책 가운데는 성경이 가장 많이 읽혀지는데 영국성서공회가 이에 큰 수고를 하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마펫 선교사는 한국인의 ‘자립선교’를 극찬하며 한국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외국의 돈이 투자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저력은 인도중국, 만주 선교와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우리 선교사에게 와서 “여러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부담감을 주었지만, 초기에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달라는 요구에 여러분들이 반응해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한국에서 해외선교회가 현지인 지도자를 돕기 위해 돈을 쏟아 붓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한국교회의 자립선교를 널리 알려 화제가 되었다.

5. 진행 방법

에딘버러 대회는 10일 동안 진행되는 동안에 오전과 오후에는 8개 위원회가 보고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 모임에는 토론은 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선교에 주요한 이슈들을 듣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에는 약 25분간의 예배가 진행되었고, 5분간의 짧은 광고가 있은 뒤 곧 바로 발표로 들어갔다. 발표시간은 치밀하게 짜져 있어서 누구도 예외 없이 ‘7분 발표’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각 발표자가 6분을 경과할 시에는 벨을 울려 마침시간을 알려 주었고, “벨을 울려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 나와 회의장에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존 모트는 탁월한 사회자로서 할 말만 하고 논쟁에 끼어들지도 않았으며 각 보고를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품과 영향력은 대회 전체를 은혜롭게 진행하였다: “존 모트는 침착하고 신중하여서 마지막 시간에 대의원들에게 간결하게 끝맺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그의 부드러움은 회의장에 흘려 나와 대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관리하는 자였다.” 한편 대회 사무총장인 올드햄(J. H. Oldham)은 존 모트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입술을 다물고 공식적인 말만 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대회 진행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큰 박수를 자아내어 좋은 인상을 심겨 주었고 에딘버러대회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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