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나무 리더십을 배양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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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의 계절이 되었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여행하기에는 딱 좋은 계절인데, 그렇다고 해서 놀러 다닐 수 없는 것은 농사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곡물은 자연의 순환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망치게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어김없이 등이 휘어지도록 큰 대가 없는 이 농사일에 인생을 건다. 이 때문에 지금이 농부들에게는 오히려 가혹의 계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또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 이 농부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씨앗을 뿌려야만 가을 수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지난해 농사가 흉작이라고 해서 올 해를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지난 해 자신이 지은 곡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해서 작파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생존과 다음 세대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농민은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하여 건강한 주부가 매일 오늘 반찬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희망을 가진 정직한 농부들은 다음의 농사를 생각한다. 미국의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폴 히버트가 그의 저서 ‘선교현장의 문제들에 대한 인류학적 성찰’에서 제시하는 바나나나무 리더십의 유형은 현재 감리교회의 차세대 리더십 문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그는 벵갈보리수와 바나나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비교하며 어떤 유형의 리더십이 선교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벵갈보리수 나무는 큰 나무이다. 나무가 큰 만큼 더운 나라에서 그늘도 지고, 땔감으로도 풍족하게 사용되는 등 얼마나 좋은 점이 많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나무로 인해 인도 남부지역에는 “벵갈보리수 아래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속담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벵갈보리수 나무의 성장이라는 것이 그 주변지역 다른 식물들의 배양을 가로막아 초토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이 나무가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는데, 이 허공의 가지에서 또 뿌리를 내린다. 이런 식으로 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나무가 아닌, 처음의 나무와 연결되어 땅을 덮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자란 벵갈보리수 나무 하나가 무려 천 평의 경작지를 덮는다고 한다. 결국 자기 자신만을 증대시켜가는 이 나무 아래서는 다른 식물들이 자랄 수가 없고, 설혹 이 나무가 죽더라도 그 땅은 쓸모없는 불모지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다음’은 없다. 이에 비해서 바나나나무는 쉼 없이 열매를 생기게 하여 인간과 다른 생물을 풍요롭게 하는 식물이다. 바나나나무는 한번 따고 난 후에는 밑동을 잘라버리는데,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고 죽은 그 자리에서 약 6개월이 지나면 어린 싹이 튼다. 그리고 또 6개월이 지나면 그 주위에 또 새로운 싹이 돋고 자란다. 이것이 18개월째가 되면 바나나 열매를 맺고 죽는다. 이처럼 바나나나무는 6개월 마다 죽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과 온갖 동물에게 도움을 준다. 여기에 ‘다음’이 있다. 요즘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 있다고 해서 뭐든 잡으려고 한다. 자기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린다. 양보와 자기희생이 없다. 그렇게 하면 다음이 없이 죽는 줄 안다. 이 때문에 불필요하게 관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결국에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희망이 있는 다음을 생각한다면 여기 이 바나나나무처럼 자신을 죽이고,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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