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교수의 'B&G 경영'] 왜 빌 게이츠보다 스티브 잡스에 더 열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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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6.05 02:59

아무리 돈 많고 지위 높아도 일반인과 똑같이 좌절·고민하다 극복하는
'치료 내러티브'에 감동 
단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구태의연한 스토리는 감동 덜 해

언젠가 2PM의 재범군 사건(재범군이 연습생 시절에 한국에 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이 뒤늦게 알려져 미국으로 돌아간 사건)에 관해 어떤 교양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재범이가 꼭 돌아와야 한다는 옆자리의 연예인 주장에, "안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 "구태여 연예인 꼭 해야 되나? 연예인 말고도 세상에 할 일은 많다"고도 했다. 순간 내 이름은 포털의 순간 검색 1위로 올랐다.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에 악플은 불과 몇 분만에 수천개가 올라왔다.

얼마 전 칼럼에서 스티브 잡스를 '난봉꾼'에 비유했다가 거의 같은 수준의 비난에 시달렸다. 정말 열화와 같은 반응이었다. 도대체 국내 어느 정치 지도자, 혹은 종교 집단을 공격한들 이런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될까? 스티브 잡스는 우리의 구체적 삶과 정말 아무 상관없다. 더구나 어떻게든 자사 제품을 많이 팔아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미국의 한 기업가일 뿐이다.

한때 그와 경쟁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자선사업에 열중한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자사의 이익을 환원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고 스티브 잡스가 한국인에 어떤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에 널린 수많은 소비자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한국인은 스스로 '잡스 교도(敎徒)'를 자처하며 교주를 모욕했다고 이토록 거세게 항의해 온다. 20년이 넘도록 애플 로고가 찍힌 컴퓨터를 사용하는 나조차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왜일까?

 스티브 잡스(Jobs) 애플 CEO가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스 베르데에서 열린 IT 기업인들의 모임 D8 행사장에서 아이폰 등장 이후 변화된 IT 업계의 판도와 애플의 향후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블룸버그
'잡스교'의 본질은 '감정 자본주의'에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거래되는 것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상품에 숨겨진 감정"이라고 그녀의 책 '감정 자본주의'에서 주장한다. 약 100년 전 생겨난 심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주목받게 된 인간 내면의 정서적 과정이 경제 활동과 결합돼 20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품의 기능적 특징이 아니라 상품의 디자인· 이미지 등의 정서적 특징이 더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그 결과이다.

뿐만 아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정서적 차원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된다. 노사 관계나 기업의 생산성과 관련해 동기 부여, 감정, 소통과 같은 심리학적 언어들이 화두가 된다. 경영자의 리더십도 정서적 요인이 중시된다.

잡스는 바로 이런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인물이다. 일단 그의 스토리텔링은 감정 자본주의의 핵심인 '치료 내러티브'의 정수를 보여준다. 감정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내면의 상처와 고통, 좌절이 희망으로 극복되는 이야기, 즉 '치료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2005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바로 이 '치료 내러티브'의 전형을 보여준다. 차고(車庫)에서 시작한 컴퓨터 사업의 성공, 사업 실패, 췌장암, 그리고 화려한 복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외친다. 늘 배고프라고, 늘 우직하라고. 와우, 정말 감동적이지 않은가?

'치료 내러티브'와 대비되는 것은 '성공 내러티브'다. 본격적 감정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다'와 같은 성공 내러티브에 열광했다. 빌 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이런 성공 내러티브의 전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고, 성공을 자선사업으로 전환하여 사회적 의미를 얻어가는 방식이다.

논리적으로 자세히 따져보면 빌 게이츠가 스티브 잡스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과 빌 게이츠의 2007년 하버드 졸업식 연설을 비교해 보라. 잡스의 연설은 고통, 열등감, 공격성으로 일관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게이츠의 연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빈곤 퇴치, 환경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도덕적으로 빌 게이츠의 연설이 훨씬 우아하고 폼 난다. 그러나 감정 자본주의에서는 다르다.

빌 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오래된 록펠러 방식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내면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내면에는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좌절하고, 고민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성공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TV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토크쇼에 나와 '자살 충동'을 이야기하고, 이제 막 스무살을 넘은 아이돌 스타들이 연습생 시절의 '눈물 젖은 라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자본주의적 특징들이다. 독거 노인을 찾아가고, 연탄을 나르고,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구태의연한 '사회 공헌' 방식으로 감정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쉽지 않다. 기업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업 경영에 정서적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으니 '느낌'이 있는 물건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끝으로 애플의 승승장구에 배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약간의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치료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쉽게 감동하는 만큼 쉽게 질려 한다. 오래 못 간다는 이야기다. '잡스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스타의 눈물 젖은 빵에 열광했던 팬들이 불과 몇 년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잡스교도 어느 날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사람의 느낌에 기초한 감정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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